선교와 문화 9주차
8장 자신학화
선교사와 현지인들 사이에서 성경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문화가 다른 만큼 같은 사물을 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인데, 이 문제의 중심에 서있는 개념이 바로 “자율”이다. 성경해석의 차이는 곧 신학의 차이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선교사의 출신국인 서구의 신학과 선교현지에서 자생하는 신학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신학만큼 교회 조직과 운영조차도 크게 달라진다. 이 때 선교사는 현지 성도와 차세대 현지 사역자들에게 권한을 얼마나 이양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어차피 현지 신생교회가 스스로 서기 위해서는 자전, 자립, 자치라는 세가지 원칙을 이뤄내야만 가능함을 1861년에 루퍼스 앤더슨 선교 지도자가 발견했다. 자전은 현지인 스스로 자국의 불신자들을 전도해야 함을 뜻하며, 자립은 현지인 스스로 교회와 신학교 및 현지 선교 프로그램의 자원을 충당해야 하는 것이고, 자치는 현지인 스스로 그 조직들을 운영하는 것이다.
루퍼스 앤더슨 |
선교사 본국의 선교 단체는 자립을 이유로 지원을 줄이고자 하고 자치문제에 있어서는 권리이양을 안하려고 하며, 현지인은 자치를 이유로 보다 더 많은 지도적 권한을 가지려고 했다. 자전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지인들은 신앙 1세대로서 핍박과 멸시를 감내하며 선교사 못지 않게 현지 교회를 키워낸 장본인으로서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이들이 과거에 이방 종교의 지도자였다면, 서구의 신학과 충돌하는 새로운 개념의 신학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상의 과정에서 다원주의는 반드시 발생하며, 상대주의에 따른 진리의 훼손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신학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서구인들의 사고체계에서 발전한 것임에도 엄연히 성경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에게 계시로 부어주신 직접적 말씀이지만, 신학은 그 말씀들을 평범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문화토양을 바탕으로 해석한 산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의 이성조차 완벽한 것이 아니다. 이해력, 사고력 모두 문화적 편견에 사로잡힌 불완전한 것들이다. 따라서 기존 서구의 신학에 억지로 성경을 꿰맞추려는 것은 잘못이다. 다른 문화권에서 서구 신학의 틀린 점을 지적한다면, 겸허히 기존 서구신학을 바꿔야 한다. 기존 선교사와 기존 서구인들 사이에서 오시고 일하시는 성령님은, 선교 현지 교인들에게도 오셔서 일하심을 우리 모두 인정할 때 가능해진다.
신학은 순수한 학문 연구라는 이름 아래에, 하나님의 영광 및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과 아무 상관없이 신학을 하는 인간 그 자체를 위한 이기적인 잘못된 연구로 빠져들기도 하다. 진리에 의문을 품고, 성도 사이에 다툼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오히려 신학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 즉 기독교는 신학으로 대표되는 사고유형이 아니라, 총체적인 삶의 방식이다. 하지만 신학은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서, 깊이 사고, 성찰하는 가운데, 밝혀진 개념과 원리가 쌓이고 서로 유기적 결합을 이뤄서 발전하는 가운데 안 생길 수가 없다. 또 우주의 변함없는 질서에 관한 공시적 틀을 제공하며, 우주와 인간의 역사에 관한 통시적 틀을 제공한다. 이상의 이유로 신학은 세상에 대한 성경적 이해, 구체적 신학 개념으로 진리를 검증, 의심과 이단의 공격을 방어하는 변증, 성도와 사역자에게 궁극의 목표를 향한 지도와 척도를 제시해준다.
새로운 문화범주 안에서는 하나님과 성경에 관한 새로운 질문이 떠오르고, 새로운 세계관에 걸맞는 상황화의 필요성이 현지 초신자 양육에서 나타난다. 현지 신학자를 양성하여 초문화 신학으로 이끌어야 한다. 복음의 유일성과 진실성에 근거하여, 문화를 초월하고, 성경적 근거로 상황화를 검증, 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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