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그리스도는 그 분의 삶을 기쁨의 삶으로 의도하셨고, 기쁨은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이다. 세상 사람들도 노래와 춤을 통해서 기쁨을 표현한다.
그러나 서구 복음주의자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나쁜 것이라고 배워왔다. 더욱이 헬라철학의 이분법적 사고로써 육신을 악으로 봐서, 몸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더욱 나쁘게 여겼다.
반감정주의적 성향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중요한 교리처럼 자리 잡았다. 더욱이 수 많은 전통사회에서는 예술을 삶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는데, 선교사들은 전통 예술을 이교적으로 보고 차단시켰다. 사람은 예술을 통해서도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데, 서구인들은 타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심지어 예술 형식들을 사탄의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정미 의원, 이랜드 ‘특정종교 강요’ 주장 논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에 한 세대를 기다린다. 즉 유행이 한 세대 정도 지났을 때에 교회에서 채용하는 방식이다. 사람의 무의식에 까지 복음을 전달하려면 현지인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형식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서구는 이성주의 헬라 철학에 지나치게 혼합된 상태라서, 문자 해독 능력과 설교에만 집착을 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결코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12강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창의성을 갖고 있다. 신학자들의 연구에 자연과학은 신학에 대해서 반발을 했고 물질세계에서 나름의 성과를 냈다. 철학적 관점에서 인문학이, 경험적 관점에서 행동 과학이, 인간의 행동을 연구의 초점으로 삼았다.
신학은 궁극의 권위를 하나님으로부터, 궁극적 진리를 계시로부터 찾지만, 인류학은 인간을 초월하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경험적 발견에서 진리를 찾는다.
신학은 악을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하지만, 인류학은 악이 구조 속에 존재하며, 구조만 바꾸면 선한 존재가 된다고 본다.
자유주의는 성경의 역사성과 이성만을 강조하여, 초자연적인 면을 배제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태도는 성경의 초자연적 면을 강조한 나머지 역사성을 소홀히 한다.
성경은 지성인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담고 있다. 때문에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깊은 지식을 알아가며 성장하게 된다.
문화적 상대성에 따라서 특정 문화가 절대적이지 않으니, 상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입장이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다. 자기주장과 거만함이 힘과 영향력으로 평가되는 세상이 사도 바울의 사역 현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겸손히 섬기는 종의 사역을 했다.
선교는 전도를 받는 사람들의 문화와 언어로 이뤄지지만, 전도 받는 당사자들은 철저히 자기 부정과 개종을 요구받는다. 개종의 변화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서 초자연적 능력으로 기적같은 일이다.
세상에 6500 여 개의 미전도 종족들이 있지만, 자신의 문자가 없는 종족들이 많다. 미개발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이며, 말은 5%정도만 기억에 남는다. 따라서 찬양, 이야기, 드라마 등의 다른 형태로 복음을 전달할 수 있다. 구속적 유비라고 해서, 성경의 진리를 그들 문화의 비슷한 사물에 맞춰서 전달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게 돼있고, 대부분의 형식은 중립적이다. 문화는 하나의 도구로써 하나님을 위해서, 사탄을 위해서 쓰일 수 있다.
13강
교육은 정보를 축적하는 것 이상으로, 가르침과 교리는 정보전달이 아니라 행위를 일깨우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해드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서구 세계는 학교라는 대규모 교육 기관을 통해서 젊은 세대를 훈련시키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교육은 인간이 속한 사회에 구성원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으로서, 해당 사회 안에서 적절히 행동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 (비/무)공식적 교육 등의 3가지 방법과 도제 제도가 있다.
교육은 사회에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문화를 가르친다. 그러나 구세대를 뛰어넘는 새롭고 많은 것을 배워서 과거를 뛰어넘게 해준다. 그리고 다른 문화로 전환하기도 한다. 이 교육과정에서 구세대를 무시하는 습관도 생길 수 있고, 현실과 동떨어진 인위적 사상과 이념의 세계로 도피하기도 한다.
학교는 실제적 경험으로 배우는 책임감 형성에 방해요인이 된다. 가정 보다는 학교를 우선순위에 두고, 부모보다 교사의 가르침에 우선순위를 두게 해서, 실질적인 삶을 파괴한다. 숙제, 시험, 학점등을 통해서 많은 양의 정보를 강요하지만, 실제 개인의 삶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성이 없다. 성적과 선생님의 인정, 친구들과의 경쟁과 인기를 습득하며, 성경과 반대되는 세속주의를 가르친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서구식 학교 교육을 전세계에 이식하려고 재원과 사역자들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결국 이 서구식 교육제도는 교회를 배신한다.
한 사회에서 타당성을 갖는 교육모델이라고 다른 사회로 쉽게 이식될 수는 없다. 해당 사회의 토착 교육 모델을 관찰, 평가해서 현지인들에게 효과적, 적절한 교육과정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배우는 이들에게 실제로 필요하고 쓸모있는가? 한 번에 소화할 수 있는 만큼의 양인가? 시간과 교육양, 산출양 고려 등등이 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서구적 요소를 가르치는데 에너지를 쏟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교회가 복음전도가 아니라 단지 현지 전통을 단절시키는 데에만 에너지를 쏟는 게 아닌가?
14강
전도 최고의 목적은 불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최고 목표이기 때문이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내리신 지상 최대의 명령이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돼있다. 전도하지 않는 죄는 영원한 죽음이 있고, 전도하는 자는 영원한 상급이 있다. 성도의 영혼이 성장하는 비결도 전도 안에 있다.
선교는 복음을 새로운 문화 속에 심는 것이며, 선교는 문화 속에 복음적 위임을 실행한다. 선교는 인류학의 문화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문화는 특정한 사람들의 총체적 생활방식인데, 표면에 드러난 형식과 표면 아래 숨어있으나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복음은 다른 문화로 들어갈 때 문화라는 옷을 입게 되는데, 그 형식을 떠나면 추상, 이상론, 도피주의에 빠져서 진정한 복음의 뜻과 가치를 상실한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하신 하나님으로서 신성을 잃지 않고 온전한 인간이 되신 것처럼, 복음도 하나님의 계시로서 진수를 잃지 않고 문화를 통해서 인간 사회에 전달될 수 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현지 문화에 맞춰서 복음을 적응시키고, 현지 문화에 맞춰서 뜻과 가치를 지니도록 재해석시키는 현장화이다.
외래문화가 토착문화에 현장화하는 과정처럼 흡수, 파괴, 공존, 변형 등의 방식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토착문화를 파괴하는 것과 완전 수용하는 두 가지 극단이 나타났는데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은 선교를 받는 나라에서 보내는 나라로 바뀌었다. 복음을 현장화하는 선교는 자기비판, 반성, 탈상황화의 선교를 거치고 마지막으로 순수한 모습을 되찾는 복음을 다시 상황화 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