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큐베득스는 신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 임에도 1976년 [세상적인 복음주의] 라는 책에서, 성공지상주의, 세속 물정에 능하고, 과학에 문을 열어제끼고, 세상 문화 수용, 세속적 성향 수용, 내세보다 현재를 더욱 중시, 하나님을 세속적으로 이해, 보편주의, 자유주의자들과 협력, 넓어지는 신학으로 비판했다.
예컨대 복음주의에서 “구도자를 위한 예배”를 만들어냈는데, 원래 성경에서는 좁은 길과 문을 찾으라고 하는 가르침을 떠나서, 인간 감정을 부추기고, 흥미위주로 바꿔버렸다. 오락 전도는 사람을 찌르는 회개를 말하지 못하게 됐다.
내적치유는 영적 치유가 아닌 심리치료로 바뀌어서, 마이클 호톤은 “복음주의는 구원에서 자기 존중으로 바꿨다”라고 지적했다.디지 하트도 “복음주의는 사회과학이 복음주의 신학의 뼈대에 살을 붙이는 역할을 한다.”
복음주의는 선동과 경영학, 마케팅에 능한 목사만을 내놓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런 방법론이 성경 말씀에서 많이 벗어나기 때문에, 비성경적 수단을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초자연적 역사를 하실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복음주의는 시장경제원리에 빠져서 교회론이 무너졌다고, 남침례교 신학교의 학장인 알버트 몰러가 지적했다.
"한국교회, 자본주의적 복음주의 수용" |
데이비스 내쉬는 거룩, 윤리가 실종한다고 지적했다.
“설교는 세속 가르침(인문학)을 흉내내고, 전도는 외판원을 흉내낸다. 목회 상담은 사회보장 상담원을, 교회의식은 법정의 형식적 절차를, 교회 프로그램은 세속 조직의 경영방식을 흉내낸다. 실질적으로 목회자가 하는 모든 일은 세속의 사본이다.”
데이비드 웰스는 다음처럼 지적 했다.
"교회는 회중의 느낌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한다. 비즈니스가 시장에서 소비자의 니즈를 발굴하고 상품을 팔 듯이 한다. 교회 활동과 경험, 문화적 설비, 교회의 메시지가 상품이 돼서, 교회를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개인의 구원이 아니게 만든다.
전도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사라지고, 교회는 취미 동호회의 부수적인 형태로 무너졌다. 자유주의자들의 문화적 성공을 복음주의가 그대로 배워서 교회를 성공적 기업으로 바꾼다. 교회는 개인적 웰빙과 직업화로 바뀌었다."
칼 트루만은 복음주의가 정통 교리를 버리고 느낌과 감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초교파 운동을 벌여서 신학의 정체성을 잃었다고 지적했고, 복음주의가 자유주의랑 결국 똑같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개혁 신학에서는 복음주의 신학을 인본주의적 바벨탑 쌓기로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끼어들 틈이 없이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놓고, 하나님 이름만 빌리기 때문이다.
개혁 신학에서는 복음주의를 개신교 신학으로 교리는 비슷한데, 뭔가 끝이 다른 이단(異端)의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자본자유주의가 공산주의에게 심판받는 이유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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