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켄가는 개혁신학을 공부했지만, 라디오 전도자로 유명한 찰스 풀러를 만나므로써 신학방향을 바꿨다. “돈은 아무 걱정 말라! 당신은 신학교 세우는 데에만 집중하라!”는 찰스 풀러의 말에 오켄가는 수락했다. 찰스 풀러는 라디오 선교와 재정을 모으는 은사가 충만해서 가능했다.
1947년 풀러 신학교를 오켄가와 풀러가 공동설립했는데, 교수들은 프린스톤 신학교와 정통의 맥을 같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스덴이 프린스톤은 구학파이지만, 풀러는 신학파라고 정체성을 천명했다. 근거는 신학파는 부흥을 추구하고, 전도를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구학파는 개혁신학을 추구했으나 신학파는 세미펠라기안을 따랐다. 그럼에도 풀러 신학교는 특정교단에 한정되지 않았다. 프린스톤 신학교는 PCUSA 장로교이다. 그럼에도 PCUSA 목사생도 상당수는 풀러신학교를 선호하며, 한국은 장로교 통합측이 풀러를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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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풀러 신학교의 교장이 된 칼헨리로 인해 자유주의 색채가 짙어졌다.
빌리 그래함의 사역은 풀러신학교가 있는 파사데나의 근처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됐다. 따라서 풀러 신학교는 빌리 그래함과 함께 성장했고, 빌리 그래함을 풀러신학교의 채플 설교자로 자주 초대한 오켄가 또한 유명해졌다.
칼 헨리는 사회주의 운동으로 가려고 했으나, 오켄가가 영입한 빌리 그래함이 풀러 신학교를 대중적 전도 집회로 방향을 바꾸므로써, 칼 헨리는 변방으로 밀려났다.
1965년 도널드 맥가브란이 교회 성장 연구소를 풀러신학교로 옮기면서, 교회성장운동이 복음주의의 핵심위치를 차지했다. 그 영향으로 1974년 로잔 언약에서 교회성장이 강조되게 했다. “보다 효과적으로, 보다 빠르게 전도가 일어나게”의 모토는 찰스 피니의 실용적 전도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맥가브란은 전도와 선교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교회, 성장이라는 단어를 주로 썼다. 교회성장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봤고, 성장되지 않음을 문제가 있다고 봤다.
사회학을 교회 성장에 중요한 도구로 간주했고, 그는 이를 거룩한 실용주의라고 불렀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항상 사회학적으로 해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례로 문화인류학을 중요시 했고, 선교가 문화 인류학에 끼워맞춰지기 시작했다.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을 전도시키기 위해서 피플 무브먼츠라는 것을 개발했다. 개개인을 강조하지만, 상호작용을 통해서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집단 개종이 된다고 봤다.
집단 개종은 AD.315~AD.500 년대에 유행하는데, 이는 통치자가 개종을 하면 딸린 백성은 강제 개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신학자들은 폐해가 심각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다수의 백성은 이방종교를 믿는 상태에서 아무 생각없이 기독교로만 종교생활을 바꿨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에는 이방종교의 색채와 풍습이 그대로 들어와서 혼합주의가 지배적으로 바뀌었다.
피터 와그너는 동질성 단위 이론을 피플 무브먼츠에 이식하므로써 이론적 토대를 더욱 성장시켰다. 간단하게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예부터 내려온 지혜를 교회 성장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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