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의미
비록 기독교가 헬라 철학에 많이 혼합되긴 했지만, 유럽에 있었기에 가장 순수하게 남을 수 있었다고 본다.
로마제국 안에서는, 개인의 인권과 자유, 평등을 포함한 기본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므로, 기독교가 핍박을 받더라도, 기독교 정수를 크게 흐릴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로마제국 안에 들어왔던 각종 이방 종교의 모습들이 녹아서 카톨릭의 제도와 복식, 관습 등이 생겨난 정도이다.
바벨론 종교와 로마 카톨릭
그러나 동방 인도로 사도 도마가 기독교를 전했고, 그 외 다른 사도들도 간간히 동방과 인도에 기독교를 전했는데, 그들이 전한 기독교는 현지에서 순수한 모습을 많이 잃었다고 한다.
예컨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 100년 뒤에는 기독교 교리와 예수 탄생 이야기, 4복음서 내용을 그대로 베낀 조로아스터교가 사산 왕조의 정략적 추진에 따라 생겨났다. 그 전 시대의 조로아스터 경전들은 구약을, 이후 시대는 기독교 교리와 신약을 베꼈다.
조로아스터교가 기독교의 모체인가?
또한 인도에서는 기원후 10세기 쯤이 되면, 인도에서 대거 몰려 살고 있는 유대 상인 정착촌의 여호와 신앙, 서방에서 밀려들어온 기독교가 인도 토착 브라만교, 불교와 섞여서 힌두교가 나타났다. 미륵신앙은 기원후 4세기에 유대교, 기독교 경전의 메시아를 베껴서 만든 것이다.
힌두교 신성 크리슈나와 예수 |
중국과 북 아시아 유목 국가들, 한국의 3국 시대, 남북국 시대에는 경교 형태로 전해졌는데, 이 들 대부분이 불교와 토착 신앙과 섞여서 명맥을 잠깐 유지하다가 사라졌다.
내한한 일학자 「모리」박사 주장|일본국보 1호「반가사유상」은 신라에서 만들어 보낸것
예컨대 신라 경주에 미륵불이 나타났는데, 경주의 승려들이 미륵불을 홀대하고 내쫓아서, 미륵불이 세상을 어떻게 구원할지 고민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불상이 바로 일본의 목조, 한국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발해 ‘십자가’ 유물은 개방과 공존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다시 유적을 파보니, 그 미륵불은 바로 십자가를 상징으로 하는 경교였고, 가야, 발해, 신라 등지에 유적으로 남아있다.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해당 나라들은 개인의 기본적 인권을 크게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반해서, 로마는 나머지 나라들보다 확실하게 보장하므로, 개인의 의견을 존중함과 같이, 기독교 교리와 성경 말씀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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