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로아스터 교
역사성
조로아스터 교의 최고신 아후라마즈다라는 유일신에 대한 언급이 바빌론이나 페르시아 왕의 비문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6-5세기 경입니다. 조로아스터에 대한 기록은 없고 아후라 마즈다 기록 뿐입니다. 그 이전에는 조로아스터나 아후라마즈다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습니다.
기원전 722년경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뒤에, 아후라마즈다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므로, 조로아스터는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을 베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리 확립
조로아스터가 페르시아에 공식적 종교로 인정받는 시대는 더 후대인, 사산왕조(AD250-650년)이며 조로아스터가 지었다는 경전, 가타스를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번역과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부터 조로아스터 교에 교리가 확립됩니다.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제도로 운영됐습니다.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에 전해진 유대교리가 조로아스터교로 바뀌었다고 저는 봅니다.
구체적 사료
- 창시자 조로아스터 개인에 대한 기록은 정말 찾을 수가 없으며, 기원전 6~5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기록은 아후라마즈다와 미트라에 관한 기록 뿐입니다.
- 창시자 조로아스터에 대한 기록은 기원후 3세기 가타스에만 의존합니다.
- 기원후 3세기부터 조로아스터교에는 마리아 처녀 잉태설, 인간을 속죄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온다는 교리가 경전 아베스타에 처음 등장합니다.
- 기원후 1세기 혹은 그 이전의 것이라 볼 수 있는, 사해 사본 발굴로 인해서, 아베스타보다 200년이나 앞선 구약 성경 사본의 등장으로, 더 이상 조로아스터 교가 기독교에 영향을 줬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결론 : 조로아스터 교의 교리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베꼈습니다.
4. 미트라 교
설명
인도 이란 제어로 “서약, 약속” 이란 단어입니다.
- 《리그베다》에서 발견되는 산스크리트어의 미트라(मित्र mitra)는 "친구 · 우정 · 친구 관계"를 뜻한다.
- "미-이트-라(mi-it-ra-)"라는 형태의 낱말이 히타이트와 미탄니 간의 평화 조약이 새겨진 기원전 1400년경의 비문에서 발견됐습니다. 미트라 신(神)이 아니라, 단순히 조약을 뜻하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 이란어 "미트라(Mithra)"와 산스크리트어 "미트라(Mitra)"는 모두 "계약, 협정, 약속"을 뜻하는 인도이란어 낱말인 "미트라(mitra)"로부터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미트라 교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교에서 비롯된 종교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1970년대에 학자들의 연구결과 조로아스터 교가 로마로 넘어오면서, 로마인들이 재창조한 것으로 봅니다. 프란츠 퀴몽(Franz Cumont: 1868~1947) 이래 미트라교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가 됐습니다.
데이빗 울란지(David Ulansey)는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는 기원전 1세기에 숭배되기 시작한 신으로 옛 이름이 새로운 신에게 적용된 것이라 주장하며, 100년을 억지로 더 끌어올렸습니다.
유물로 본 역사적 연대
- BC 3세기에 페르시아에서 성행됐으며, 아르탁세륵세스 2세(재위 BC 404∼BC 358)의 비문(碑文)에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 미트라(Mithra)의 그리스어인 "Μίθρας (미트라스)"가 나타나는 초기의 예로는 기원전 4세기의 크세노폰(기원전 430~354)의 저작입니다.
-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로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키루스 2세(재위: 기원전 559~530)의 전기인 《키루스의 교육(Cyropaedia)》이 있습니다.
구전 전승이 600년 이상 됐다고 주장을 하지만, 실증적으로 제시할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미트라 교는 AD 1~4세기 까지 로마에서 성행했습니다.
기독교와 비슷한 교리
기원후 3세기에 조로아스터 교가 기독교리를 받아들인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 미트라는 12월 25일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 그는 위대한 방랑교사였다.
- 그에게는 열 두 제자가 있었다.
- 기적을 행했다.
- 미트라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미트라 성 삼위일체설을 형성하였다.
- 그는 무덤에 묻혔으며 3일 후에 다시 일어났다.
- 미트라 교도들은 그가 부활한 날에 축제를 베풀었는데, 그 날은 지중해의 여러 나라에서 춘분축제 였으며, 나중에 기독교의 부활절이 되었다.
- 사람들은 그를 선한 목자로 불렀다.
- 그는 길이요, 진리요, 빛이요, 구세주 혹은 메시아로 여겨졌다.
- 미트라를 기리는 거룩한 날은 sunday 즉 일요일이었다.
결론
많은 학자들이 미트라교가 기독교에 영향을 줬다고 말을 하지만, 기독교는 수천년에 가까운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도 아무리 늦어도 다윗 시편 저작연대는 기원전 1100년경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수 많은 예언과 교리들이 선지서에 등장하는데, 이사야(기원전 745~695)를 포함한 구약선지자들이 메시아, 심판과 종말 등 조로아스터교가 영향을 받았을 예언들을 많이 써놨습니다.
미트라교는 페르시아 원정을 다녀온 로마인들이 아무리 빨라도 기원전 1세기에 새롭게 만든, 종교입니다.
미트라교에 대한 기록은 보통 기원후 1~4세기에 있습니다. 그 전 기록은 아후라마즈다와 미트라의 기록인데, 이 당시에는 조로아스터라는 사람의 기록이 없었다고 합니다. 조로아스터에 관한 기록은 기원후 3세기가 돼서야 가타스라는 경전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미트라교는 기독교를 베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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