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히브리서
- 복음에서 흘러 떠내려가지 않아야 한다 2:1
-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야 하며 3:8,15 ; 4:7
-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아야 하고 3:13
-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3:12
- 광야 세대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3:18 ; 4:6,11
-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불순종과 삶에 나타나는 악행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에서 기인한다 (3:19).
또한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감(4:2~3)의 인용과 3:7~4:13에 있는 믿음과 순종의 관계는 둘 사이가 절대로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한다.
- 하나님의 복을 경험한 자들이 타락하면 회개할 수 없다는 경고 6:4~6
- 고의적인 죄 1:26는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며, 성령을 모욕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10:29
- 뒤로 물러서지 말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인내 (10:36~39)
등등은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10:26)로 결론 지으면서, 우리 삶에 나타나는 악행으로 구원을 잃어버림을 서술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음으로 이러한 악행이 나타난 것이며, 순종하지 않음은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즉 믿음이 있어야 순종을 한다. 따라서 믿음은 역동적이고 행위로 표현된다. 믿음은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6. 야고보서
야고보는 최종적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선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한다. 순종의 필요성은 2:14~26에 있는 믿음과 행함에 대한 야고보의 유명한 논쟁으로 귀결된다.
로마 카톨릭 해석자들은 바울은 유대교 율법상의 의식적인 행위들이 의를 얻는데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배격하고 있고, 야고보는 여기에서 도덕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해석에 반대하면서, 바울이 주장하는 행함은 할례, 절기의 준수와 같은 의식에 국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개신교 내부에서 새 관점을 지지하는 자들은 로마 카톨릭과 다른 기원을 갖지만, 구체적인 면에서 동질성을 공유한다.
성경 원문에서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한 “의롭게 하다”를 여러 가지로 분석했으나, 결과적으로 다르게 사용한 증거는 없다. 단지 저자는 야고보와 바울이 서로 다른 내포적 의미로 사용했다고 본다. 야고보는 실천된 행위를 통해서 선언된 의를 가리킨다면, 바울은 불경건한 자에게 의롭다고 평결해주는 법적 의미로 봤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 모순되는 게 아니다. 야고보가 비판한 믿음만 자랑하는 자는 오늘 날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단순한 지적 동의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술 마시고, 담배피고, 바람피고, 각종 문제를 일으키면서 주일에만 교회 나가거나, 아예 교회를 다니지도 않으면서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울도 구원을 주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온 삶을 그 분에게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서로 설명은 다르게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둘 다 믿음의 열매로 선행이 나타난다고 같은 결론을 맺고 있다.
야고보는 믿음이 행함을 낳고, 행함으로 온전하게 됨을 표현했다. 구원하는 믿음은 살아있고 활동적, 역동적이다.
7. 베드로 서와 유다서
베드로 전서 2:4는 믿음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5:12에서 은혜에 굳게 서고, 5:9에서 마귀를 대적하라는 구체적 행위를 명령한다. 그 행위의 순종 가운데 2:19에서 최후의 상급을 받을 것으로 가르친다. 즉 믿음은 순종을 명령, 요구 한다.
그 반대의 이야기는 베드로 후서와 유다서에 적혀 있다. 거짓 선생과 불경건, 방종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열매 없거나 게으른 자들이라고 벧후1:8에 적혀 있다. 거룩한 특성(벧후1:5~7)이 바로 죄용서 받게 하며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벧후1:9).
거짓 선생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을 지언정, 방종, 음란, 방탕한 삶의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결과적으로 거룩한 명령을 저버림으로써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났다 (유2:20~21).
요약하면 믿음과 행위는 별개라면서, 현재 개신교 내부에서도 목사와 신학자들이 방종한 삶을 살면서 음란, 방종, 탐욕을 두둔하는 양심적 판단이 결여된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바로 거짓 선생이자(벧후3:17), 개와 돼지 같은 자들이다(벧후2:22).
더 나아가 베드로 후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계속 자라가라(3:18)” 는 행위의 명령, “점도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써야(3:14)” 라는 행위의 명령을 더 하고 있다.
8. 요한계시록
로마시대에 차별과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들은 당시의 황제 숭배 사상을 포함한 이방 우상 숭배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이 때 요한은 전혀 타협하지 말라고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끝까지 이기고 극복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불못에 던져진다.
요한은 순종을 가져오는 믿음보다 최종적 상급을 받기 위해 순종을 요구하는데 집중했다. 계시록에서 보여지는 진정한 믿음은 주관적 경험이 삶 전체와 분리되지 않으며, 신약 전체에서 믿음은 행동하며 변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순종과 분리될 수 없으므로, 성도는 예수님께 자신의 목숨까지도 헌신했다.
행위에 따른 심판과 상급은 영생과 관계됐으며, 예수님께서 흰 보좌에서 심판하실 때에 행한 대로 각자에게 갚아주신다고 명시돼있다 (20:11~15 ; 22:12). 요한은 최후 상급을 받기 위해 신자들이 인내, 순종하라고 권고하는 목적으로 편지를 썼다. 순종을 낳는 믿음보다는 믿음의 결과인 순종 그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9. 저자의 단락 결론
영생의 복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이라고 시약에서 선포하지만, 한편 순종과 훈련의 필요성이 중심적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 믿음은 영생을 얻기위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 구원을 하나님께로부터 얻게 한다.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든다.
그러나 구원하는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고, 회개와 개인의 삶의 변화와 분리될 수 없다. 더 나아가 바울은 인내와 사랑으로 드러나는 믿음이 진실되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선행이 동반되지 않는 믿음은 헛것으로 봤다.
신약 전반에 나타난 믿음의 우선성은 율법주의를 배격한다. 그러나 반율법주의도 배격하는데, 사랑과 헌신, 계명을 지키는 순종의 삶을 살아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그들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