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문화 5주차
5장 서구 선교사들의 문화적 전제
새로운 문화에 들어가는 선교사가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오해와 섣부른 판단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지 지역 사람들의 세계관을 연구해야 한다. 외국인들도 우리 나라를 오면, 세계관을 아주 깊게 연구하고 이에 대해서 때때로 지적을 하기도 한다.
북미 사람들은 이성에 근거한 과학적, 합리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의 영향에 따라 유대교의 유일신이 창조한 세계라는 우주관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세계를 신이 꿈꾸는 환상 정도로만 본다. 그래서 그들에게 서구적 신학을 주제로 말을 건다면 설득력이 없다.
서구의 신학은 그리스철학과 혼합된 결과물이라서,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 합리주의 시대까지 연결되어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도달한다. 스콜라 학파들이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여겼으나, 마침내는 철학이 신학을 밀어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후에 베이컨의 경험론이 데카르트의 대척점에 서서 과학을 장려하자, 과학이 철학을 변방 구석으로 몰아내버렸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 결과 서구 신학은 현실의 삶에도 이원론을 적용해서 신앙과 과학을 분리시켰고, 선교 현지에서도 신앙 따로 과학을 포함한 신학문 따로 가르쳤다. 그 결과는 현지인들이 세속 학문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는 결과를 낳았고, 세속주의가 우세한 세상으로 지구촌은 바뀌었다.
헬라철학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자 작은 우주로 보았고 육체와 물질을 악한 존재로 보았다. 그게 기독교 신앙과 혼합된 결과 유럽인들은 지구와 자연, 우주를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생태계와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하지만 정작 기독교의 모태가 되는 유대교는 자연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하고 유익한 것으로 보았고, 인간을 자연을 관리하고 돌보는 정원사로 여겼다.
하나님을 배척한 이성주의에서 태어난 과학, 그 과학이 낳은 물질문명의 발전은, 영적 생활을 배척하고 물질적 부귀와 건강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게 됐다. 그리고 약자를 폭압적으로 착취한다. 또한 헬레니즘 철학에서 비롯된 개인주의와 자유는 개인의 소유권을 우선시하고, 공동소유에 대한 개념이 희박해졌다. 이로써 현지인들의 공동소유제 문화에서 충돌이 발생한다. 또한 유럽인종은 물질 문명이 지속적으로 발전한다는 진보라는 개념에 목이 매여 있다. 그래서 늘 과학연구와 돈 문제로 세상 문제를 진단 해결한다고 믿으며, 한정된 자원을 두고 늘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한다. 늘 앞서가길 바라고 뒤처지길 두려워하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
유럽인종은 세상과 상황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길 좋아하므로, 세상을 분류, 구분하고 책임소재와 잘잘못을 따지길 좋아한다. 그리고 세앙에 닥치는 모든 문제를 인간이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또한 유럽인종은 세상을 양자택일로 똑 부러지게 생각하고 공과 사를 구분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으며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럽인종과 다른 인종 사이에서 생활양식과 관습이 충돌해서 갈등이 발생한다.
그 밖에도 이 책에서는 북미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특성을 서술하고 이에 대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차이점을 밝혔지만, 실상 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같은 상황이라고 저는 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사고관념이 발생한 원인과 문제가 생기는 이유 또한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결국 인본주의의 극치인 헬레니즘의 철학을 유럽인이 받아들여서 생긴 문제이고, 심지어 합리주의 시대이후부터는 기독교 신앙을 배신하고 이성주의 일변도로 나갔습니다. 유럽인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버려놓고서 또는 믿음을 순수하게 지키지 못하고 인본주의 헬라철학을 섞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 기독교 자체에, 성경 말씀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필립 만토바와 아프리카의 티비죠슈아를 포함한 요즘 동남아, 아프리카, 남미, 서남아 등지에서 엄청난 성령대부흥, 쏟아지는 초자연적 기적들, 서남아를 중심으로 산불처럼 번져가는 삼위 하나님을 모세처럼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만났다는 간증들이 기독교 불모지에서 쏟아집니다. 그리고 선교사가 중심이 아닌 현지인들의 체험적 간증이 신앙이 중심이 되는 시대로 이미 바뀌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 무력한 선교사를 사도, 선지자적 현지인들이 밀어내고 있습니다. 즉 서구의 문화적 기법이 아닌 하나님 그 자체를 전달함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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