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교회 목회적인 입장에서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설교는 가능한가? 아니면 불가능한가?
이상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말하고, 그 이유에 대하여 디테일하게 설명하시오. (교재 2부 1장 참고)
교재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사람끼리 말이나 글자, 음성, 몸짓, 화상 등으로 사상,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기 때문에, 기존의 설교도 커뮤니케이션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교회 목회적 입장에서 커뮤니케이션으로서 설교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불가능할 수 없습니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은 키에르케고르와 그의 제자 카를 야스퍼스가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19C 사람들이라서 이미 사회와 신학교, 교회들은 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커뮤니케이션은 고대 그리스에서 소피스트들이 수사학으로 발전시켰고, 어거스틴은 이를 기독교로 수용해서, 진리를 가르쳐 알리고, 상대를 기쁘게 하며, 그의 마음을 설득해서 영향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특별히 요즘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강조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인 1980년대는 매스미디어 시대라고 떠들더니 군대제대 후인 2010년대부터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떠들어서 10년동안 지겹게 보고 들은 단어입니다.
로널드 알렌은 포스트 모던 시대의 설교는 다차원적이라면서, 성도 집단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취향과 목적이 같은 줄로 착각하지 말고, 개인별로 세분화된 삶의 가치관, 신앙형식을 간파하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 모더니즘의 설교는 오히려 신약 성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스데반, 빌립 집사와 같은 성도들이 먼저 본을 보였고, 전도서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가 성의 사마리아 여인을, 문둥이 나사로를,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등등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대화로써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빌립 집사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개인적으로 만나 이사야서를 설명해준 뒤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줬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방식의 개인간의 다차원적 커뮤니케이션 전도는, 오히려 우리 선조들이 구한말, 일제강점기, 한국전쟁후로 이어지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개인간 간증 전도로 교회를 폭발성장시켰습니다.
기존 교회적 입장의 설교는 매스미디어 방식의 전문가 집단이 대중을 모아서 설교하는 엘리트 중심적 많은 자본이 드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 방식의 설교는 개척교회가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상호 대화와 접촉을 통해서 전도할 수 있는 더 적은 비용의 더 쉬운 설교입니다.
이는 설교하는 전도자 본인이 진정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서, 진실로 만나는 사람들을 어려움에서 해결해줄 수 있는 하나님을 전할 수만 있다면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짜릿한 전도 방법입니다. 이 전도의 짜릿한 전율감으로 전도에 목숨 건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단지 대형교회 환상에 젖어있는 허영심에 빠진 목회자들이나 모양이 빠지니까 기피하고 싶은 방식이겠지요. 그들은 구세대의 매스미디어가 다시 세상을 지배하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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