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6일 목요일

신서 ; 일본 10

3편 대마도주(對馬島主)
 
제가 앞서서 [신서 2]에 글을 썼을 때, 구마모토 성의 지진을 다루면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섞어서 쓴 커다란 실수를 했습니다. 바쁜 와중에 방대한 글을 가급적이면 축약해서 쓰려다보니, 둘을 나눠쓰지 않고 쓰다보니 한 사람의 인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게 눈 뜨고도 코베인다는 속담에 어울리네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어찌할 수 없고, 이 들에 관련해서, 글을 풀어 가겠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친척관계이며 불교 신자이고 구마모토 성의 영주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 신자로서 상인 집안 출신으로서 영주 자리에 앉은 사람이지요. 서로 영지가 이웃으로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라이벌 관계로서 둘 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선봉장입니다. 여기서 가토 기요마사가 지진이 난 구마모토 성의 주인이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주교 말살 정책에서 순교한 자입니다. 그 얘기를 제가 묶어서 가토 기요마사 한사람의 이야기인 양 썼을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죄송합니다.
 
이 중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자, 대마도주 인 소 요시토시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소 요시토시의 선조는 종중상(宗重尙)인데, 이에 대한 자료를 이미 다 아실텐데, 다시 한 번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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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지'(東萊府誌, 1740년 조선 영조16년 박사창(朴師昌) 편찬)에서, 대마도주 종씨는 원래 한국의 송씨라는 기록을 황백현 박사가 발견했습니다.
 
동래부지의 대마도항목에는 '대마주는 옛적 계림(鷄林, 신라)에 예속돼 있었으나 어느 때 왜인이 점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략) 세상에 전하기를 도주종씨(島主宗氏)는 그 선조가 원래 우리나라 송씨로, 대마도에 들어가서 성을 종씨로 바꾸고 대대로 도주가 됐다'고 쓰여 있습니다

또 동래정씨 문중 시조 묘역이 소재한 화지산(和池山, 부산 부산진구 소재) 항목에 '구전(舊傳)에 대마도주 종씨의 조상도 이 산에서 장사 지냈다 하나 지금은 그 곳을 알 수 없다. 술사(術士)가 말하기를 정씨의 자손은 큰 벼슬을 맡은 자가 많고, 종씨 역시 대대로 도주(島主, 대마도주)를 세습하니 그 귀함이 비슷하다'고 기록돼 있다.
 
황 박사는 이 같은 기록으로 미뤄, 대마도주들은 '일본인 종씨'가 아니라 '한국인 송씨'이며 초대 대마도주의 묘역도 대마도가 아닌 부산 땅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나 송()은 일본어로는 소오(そう)“로 발음됩니다. 또한 620년간 지배해왔으면서도 초대 소오 씨(소오 시게히사 = 宗重尙 = そうしげひさ)의 무덤이 일본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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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대마도아비류(阿比留)의 백제] 신문기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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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에 걸려있는 문패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아비류(阿比留)! 4만여 명의 대마도 주민 가운데 상당수가 부옥(釜屋·가마야)’ ‘부산’ ‘아비류(阿比留)’를 성씨로 한다. 부산씨는 일본에서도 대마도에만 있는 성씨이고, 아비류아사달’ ‘아직기’ ‘아사녀’ ‘비류백제 등과 어원이 같은 백제 계통의 성씨이니 대마도민들의 혈통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일대에는 667년에 백제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백제식 산성인 가나다노기’(金田城)가 있다. 백제와의 인연은 13세기 중엽까지 대마도를 지배했던 아비류’(阿比留)씨 가문의 혈통에서도 더듬어볼 수 있다. ‘아비류아사달’ ‘아직기’ ‘아사녀’ ‘비류백제등과 어원이 같은 백제 계통의 성씨인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중국땅 요서가 백제 식민지였다
규슈(九州)에는 7개의 담로(對馬, 壹岐, 伊都奴, 投馬, 邪馬臺)가 있었다(井上光貞). 서기 100년경에 이미 규슈지역의 키 작은 원주왜인(原住倭人: 고고학상의 키작은 남방계 단신인)을 정복하고 비류백제 왕실의 자제(子第)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가 담로주(擔魯主)로 통치하고 있었다.(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이 때문에 담로가 많이 있었다.

 백제의 요서경략설

백제의 요서경략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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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합니다. 즉 송씨 가문 이전에 아비류 가문도 백제계 비류가문 출신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이상보다 더 많은 자료는 네이버 블로그 [아우터레위-일본-대마도의 한국역사]에 실어 놨습니다.
 
이상의 이유 때문에, 일본 왕실에서는 대마도주 가문을 약간 다르게 보고, 조선왕실의 덕혜옹주와 결혼시키는 장면을 경북 예천 외가댁에서 꼬마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덕혜 옹주에 대한 영화가 나왔다니, 역사적인 사실은 잘 참고하시면 될 겁니다

네이버 자료에도 올라와 있습니다. 이 자료가 올라왔을 때, 저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제 또 하나의 글이 예언의 시대가 끝나고 뒷북을 치는 구나! 뭐든지 하나님께서 시키실 때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 도움으로 다른 사람들이 더 내 글을 잘 이해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일지 모른다.’
 
환상 속에서는, 여름인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병사들이 사열식을 하고 있었으며, 조선 왕자 중 한 명이 그 앞에서 대표로 선서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덕혜 옹주의 불안한 증상의 이야기가 일왕실에게 들려졌습니다

그러자 일 왕실에서는 조선을 흡수통합 하려 했는데, 바로 일본 왕족을 한국왕족과 통혼시키기에는 뭔가 격이 안 맞고, 정복자의 가문과 피정복자의 가문을 맺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 게, 일본 정치계의 지배적인 생각임을 여호와 하나님의 전지적 시점에서 다 알게 됐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제 머리 속에도 전해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한편 대마도와 구주 지방의 영주들이 친한 세력임을 알았고, 그 중에서 대마도 주가 한국인의 후예라는 것을 당시 일본인들도 알고 있어서, 일본 왕실의 높은 할머니가 일본의 어떤 장군과 상의하고 추진해서,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게 됩니다.

어서 추진하도록 하라! 내가 윤허하마!”

그리고 일본 왕실 가문의 친척들이 서로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 것 참 잘됐네!” 
, 그래요! 이제 두 사람이 서로 위로하면서 살면 될 거예요.”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일본 왕실이 뭔가 군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분위기였습니다.
 
네이버 캐스트 내용대로, 당시 궁녀들 사이에서는 덕혜의 남편이 애꾸눈에 키가 작은 추남이라는 소문이 도는 장면, 조선일보는 신랑의 얼굴을 삭제한 결혼식 사진을 실어 분노한 민심을 대변하는 과정도 보여주셨습니다

경제적 사정으로 그동안 쓰던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로 해고하고, 정신병원으로 덕혜 옹주를 보내는 장면, 덕혜옹주의 딸이 어머니로 인해 충격을 받고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장면,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가 딸을 찾으려고 경찰서에 신고하는 장면, 합의 이혼하는 장면 등등이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들은 네이버 캐스트에서 글로 보시겠지만, 이 글을 쓰는 저는 그 당시 앞에서 생생하게 봐서 가슴이 아픕니다.


낙선재로 돌아온 덕혜 옹주를 보고, 조선 왕가 사람들이 대체 일본에서 어떻게 학대 했길래, 그렇게 똑똑하던 옹주가 이렇게 바보가 돼서 돌아온단 말인가? 남편이 정말 소문대로 애를 괴롭혔나?’ 충격이 컸습니다

소문으로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차이가 큰 법이지요. 그래서 훗날 낙선재로 찾아온 늙은 신사에게 조선 왕가의 남자가 말했습니다. 덕혜 옹주의 아저씨 뻘 되는 사람입니다.

당신 더 이상 오지마! 당신은 자격 없는 사람이야! 어떻게 했길래, 애를 저렇게 만들어놔?”
 
그 나이든 신사는 그냥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은 나를 믿어 줄 거야. 그 때를 기다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다시 찾아올 수 없단다. 이 게 마지막이란다. 가서 말해주거라.” 

성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저 남자는 옹주를 진심으로 사랑했단다. 같은 처지의 아내를 진심으로 자기 자신처럼 여기고 사랑했단다. 하지만 옹주가 어린 날에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충격이 크단다. 마음을 열 수 없었단다.”
 
덕혜 옹주가 학창시절에 왕따를 당했습니다. 이제는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동급 일본 학생들, 감시하는 일본군의 압박, 아버지인 고종, 이복 오빠인 순종이 분명히 독살됐으며, 자기도 언젠가는 독살될 거라는 두려움이 사로 잡았습니다. 과거 자기 나라였던 조선에서 왕권을 잃었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한 기억으로 조선 왕녀를 무시해서, 당당했던 정신을 엎어버리는 무력감을 잃으키는 모욕적인 일들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성을 잃었습니다.
 
저는 꼬마로서, 낙선재 문 앞에 서있는 소 다케유키에게 달려가서, 아저씨, 빨리 들어가세요! 참 답답해요! 그냥 무시하고 달려가서 진심을 말해주세요.” 라고 열심히 말하고 다리에도 매달리고, 그 손을 잡아 끌었습니다

저의 존재를 느꼈는지 잠깐 멈칫하더니, 아무도 없음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가만히 기다려보았습니다. 들어가보라고 속삭이는 음성에 정말 갈까 하는 생각도 했고, 한편으로 나이를 먹고 힘이 없는데,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가기에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마음 속에서 고민했습니다

젊은 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내를 만나서 기뻤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자기보다 더 나이든 할아버지들을 밀치고 들어가서 아내를 만날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더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결국 발걸음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언젠가 마음의 준비를 하면 다시 가봐야지 생각하면서도, 거절을 당해서 좌절한 상태라 피일차일 미루는 중에 두 사람 다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을 먼저 떠난 사람은, 소 다케유키인데, 그 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예수님께서 아들아! 그가 먼저 갔다. 참으로 안타깝다!” 라고 말씀하셨고, 미리 사람들에게 알려줬어야 했는데, 제가 말하지 않고 가만히 참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라고 제가 대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소 다케유키의 사망년도는 1988, 제가 그 환상을 최초 본 시점은 1982년도 경북 예천과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988년이면,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고, 1982년이면 5살 정도 되는 나이입니다. 그 때에도 제 마음 속에는 유명해지고 싶다! 인정 받고 싶다! 내가 지금 그냥 말하면 묻히겠지!’ 마치 제 생각처럼 마귀가 자꾸 속삭여서 예수님께서 자꾸 말하라고 하셨는데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마귀의 괴롭힘은 계속돼서, 2015년도까지 저는 제가 인정받는 자리가 아니면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제가 인정받을 제 이름을 건 곳에서만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예언을 할 기회가 모두 지나가 버렸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소 다케유키가 들으라고, 1982년도에 길거리에서 외치기만 했어도, 평생 그 둘이 아픔을 가슴에 묻고 죽지 않아도 될텐데. 제 기억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억에 묻혔지만, 이제 글을 쓰면서 생각이 났습니다. 소 다케유키가 죽었을 때, 저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울었습니다. 시공을 초월에서 다케유키가 낙선재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저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하나님과 저는 그 부부의 일생을 지켜봤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저를 속여서, 예수님께서 예언을 말하라고 하시는 명령을 계속 무시했습니다. 1982년 즈음, 경북 예천에서 분노가 들끓어서 거부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할 수 있다! 내 말씀을 사람들에게 말하거라!”
제가 대답했습니다. 전 아직 어리잖아요! 어떻게 할 수 있는데요!”
사탄이 속삭였습니다. 사람들은, 네 말을 가로채서 자기 이름을 덧씌워서 뺏어갈 것이다! 흐흐흐 말하지 마라!”
싫어요! 예수님, 말하기 싫어요! 제가 칭찬받고 싶어요. 부자가 되고 싶어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중에 어른이 돼서 말할 거예요!””
아들아! 제발 부탁한다! 제발 말하거라! 내가 몇 년 더 기회를 주마! 어린 나이에도 충분히 내 말씀을 증거할 수 있단다!
싫어요! 싫단 말예요! 제가 인정받는 위치가 아니면 안할래요!”
 
저는 이제 제가 유명해지고자, 세상의 욕망과 욕구를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려고 합니다. 오히려 마귀는 이 마음을 이용해서, 반대로 하나님의 예언을 바로 발표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제가 바보취급을 당하더라도, 늦었던 빠르던 할 것없이,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에 순종하려고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마치 하나님의 비밀이 다 뺏기는 것 같아도 제가 인정받지 못해도, 글을 보낼 것입니다. 예언할 기회를 놓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국수주의자였지만, 이제는 온 누리, 온 겨레와 나라가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도록 최선을 다 할 생각입니다.
 
소 다케유키와 다르게, 20대의 젊은 날 2002년 쯤일 겁니다. 저는 의처증에 걸린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은 대가로, 저도 똑같이 여자를 혐오하는 병에 걸려서 극심하게 미워하고 싫어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일본 열도를 보여주시고, 사랑하던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귀므로 배신당한 여자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여자는 너무 분노에 차서 그 둘의 얼굴에 염산을 붓고 복수했습니다. 그 장면을 다 보여주신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여자들이 품행이 단정하지 않다고, 담배와 술을 한다고, 거만하다고, 여자들을 미워하느냐? 보아라! 지금 일본 여자가 너의 생각과 달리, 남자에게 배반을 당했다. 과연 여자들만이 나쁜 것이냐?
 
아들아! 너 한국에는 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서 위로를 해줄 수 있다! 그런데 일본에는 예수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미치고 있다!
 
일본은 나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가 필요하다! 누가 내 마음을 알아서, 일본에 나 예수를 전하겠느냐?”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엄청 나게 거대한 모습으로 한국 땅에서 단 한 걸음 만에 일본 땅을 밟으셨고, 규슈와 시코쿠, 혼슈 섬 위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며 위 말씀을 하시며 부르짖으셨습니다. 마치 한반도의 선교사들이 일본에 와주길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한국과 일본 목사님들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부디 예수님을 여러분의 나라와 겨레에 꼭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여러분의 나라와 겨레가 부강해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저는 2016년부터는, 다시는 명성과 부, 권력 등 세속적 욕구를 추구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뤄지지 못하게 하며, 마귀가 사람을 조종할 때 쓰는 도구들입니다

오히려 당장 손해보는 것 같아도,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순종할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마 어린 신동(神童)이 하나님의 예언을 발표한다고 말했겠지요

그래서 아무 조건 없이 이 글을 드립니다. 앞으로도 나오는 모든 편지와 글을 아무 조건도 바라지 않고 뿌리겠습니다. 앞서 중국에도 분노로 글을 써내려갔지만, 중국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말씀을 아무 조건 없이 전할 생각입니다. 오직 조건 없는 사랑과 순종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음을 일생을 통해서 철저히 겪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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