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참고 자료를 안일하게 의존하는 오류
실존성과 신뢰성을 의심할 만한 부정확한 자료를 참고한 경우를 뜻합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3:5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물에 대해서 여자의 양수, 남자의 정액, 성경 말씀 등등을 신학자들이 엉뚱하게 적용해왔습니다. 이 책에 안 나왔지만, 이런 방식은 현대 세계에서 성적 욕망인 리비도에 집착한 프로이드와 그 후계자들의 심리학과 이방 신비주의 종교에서 추구하는 과도한 성적 집착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여기서 확실한 정답을 준 신학 전공 여학생은 벨리빌의 견해인데, 그 견해는 기존 일반 보통교회에서 오래 전부터 설교해왔던 통념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맑은 물을 뿌려서 죄악을 씻어준다는데, 다른 성경 구절과 부합하므로써 가장 탁월한 주석이라고 저자가 말했습니다.
신학자들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게, 보통 일반 목사들이 아무리 성경 말씀을 갖고 얘기를 해줘도 반박하고 믿지 않다가, 같은 내용을 다른 신학자가 신학자만의 방식과 논리로 논증할 때 비로소 탁월한 아이디어라고 인정을 합니다. 이미 오랜 세대와 세기동안 일반 목사들이 설교할 때는 비논리적이라고 안믿고 구원의 길을 거부하다가, 신학교 여대생이 어렵게 논증을 해줘야 받아들입니까? 그 전까지는 이방 종교와 세속철학에 신학을 섞어버려서 하나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드는 게 신학자들이 저지르는 죄악입니다. 고린도전서 2:17, 고린도후서 4:2
물, 성령에 관한 신학적 해석은, [종말의 오심 : 예수 그리스도, 서재주] 책 200~201쪽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먼저 제출한 리포트에서 이 부분을 쓰지 않아서, 되물려서 다시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리포트를 제출하라는 일이 기적처럼 발생해서, 이 기회에 올립니다. 아래 줄부터 인용 내용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우리의 죄악을 씻어 내는 “물”로 표현한다.
이사야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요한복음 7장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에스겔 36: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물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거듭난 사람으로 만든다. ......... 이러한 성령의 칭호들은 “모든 하늘의 풍요가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는 샘물(요4:14)이며, .....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상입니다. 그래서 유럽 개신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폐쇄시켜 버리셨습니다. 소득수준 2만불 넘어서 탈종교화됐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은 다 헛소리이고, 신학자들이 먼저 사신신학(Gott-ist-tot-Theologie, Death of God theology)과 은사중단론을 내세워서 하나님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럽 개신교단과 신학교에서는 은사와 기적이 나타나는 교회들마다 모두 이단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 다음에 인기영합과 구소련 스파이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간 유럽 신학자들이 마르크시즘을 신학에 섞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유럽 교회들이 무신론에 오염되기 시작했고, 무신론자가 돼버린 유럽 개신교 성도들은 더 이상 죽은 하나님을 붙들 수 없어서 개신교회를 나갔습니다. 적어도 카톨릭은 하나님께서 죽었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그나마 건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1984년 즈음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공산/사회 주의를 사갈시蛇蝎視 한다. 뱀과 전갈 보듯 미워한다는 뜻이다! 나 하나님을 멸시, 무시하는 무신론을 담고 있으며, 그들의 교리는 사탄이 속삭여서 일러준 것들을 받아적은 것이다. 공산주의는 나 여호와 하나님,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훼방하므로, 사탄을 섬기는 오컬트, 광신적(狂信的) 사교(邪敎)로써 정체성이 드러나게 만들겠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김일성, 체 게바라를 신처럼 떠받들며, 신앙대상으로 삼고, 공산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에 집단으로 광기적 물의를 일으키는 거라고 성령님께서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2017년 2학기 현총장님의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태극기 집회를 비판하실 때,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이 종을 심판하겠다. 쓴 맛을 보여주겠다. 그가 지지하는 좌파정당의 악행을 이 종이 똑같이 학교에서 되풀이 하도록 해주마! 바로 자기 입맛에 따라서만 쓰는 코드 인사와 법 위에 군림해서 방종하는 초법적 행위를 저지를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고초를 겪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열어주마! 민주주의를 좋아하니까, 민주주의 방식으로 당해봐라! 하극상으로 배신당하게 해주마!”
그 말씀이 2018년 2학기 개강 이후 이뤄져서, 학교 곳곳에 총장님을 향한 비판 대자보가 붙어 있습니다.
6. 언어적 병렬광
이 책의 저자가 논지를 제시할 때, 구체적으로 자기가 다루는 부분의 정의와 구체적 실례를 서두에 분명히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책에서 볼 때는 ‘대구법’이라고 썼는데, 그게 성경 속에서 성경 저자가 한 지문에 모아서 쓰는 문학적 기술인 대구법인지, 아니면 신학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성경 여기저기서 구절과 낱말을 모아서 대조, 대구시킨 것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내린 결론은, 간단하게 신학자들이 각자 연구한 구약성경의 낱말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실제로 발견된 고대 문서에 대입해도 명확한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성경의 낱말에 대한 기상천외한 가설과 연구, 이론들은 실증에 근거하지 않고 개인 상상력의 산물에 지나지 않음을 증거했습니다.
7. 언어와 지성을 결합시키는 오류
사용하는 언어에 사람들은 생각 방식을 영향 받고, 사고 패턴이 제한된다는 오류입니다.
여기서 인용한 언어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입니다. 이 들 언어에 있는 시제에 따라서, 히브리인과 헬라인 사이에서 시간에 관한 관념이 제한된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는 완료와 미완료 시제 두가지, 헬라어는 과거, 현재, 미래 세가지 시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시간관념이 부족하고, 헬라인은 시간관념이 좀 더 명확해진다는 주장이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과학적 사실과 실제로 조사한 연구 통계 없이, 단순히 자기 감정과 기분으로 주장을 전개할 뿐입니다. 언어가 사람의 사고과정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아프리카 적도 부근과 태평양 제도에 사는 미개 부족들에 따라 2개, 3개 혹은 10개, 100개를 넘어가면 더 이상 숫자로 부를 수 없는 언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기존의 숫자를 덧붙여 여러 번 반복해서 표현해야 합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자기 언어 밖의 많은 숫자를 바로 세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사칙연산에 약합니다. 그 반면에 더 많은 숫자를 가진 사람들이 바로 보고서 숫자를 대충이라도 예측 파악해서 말을 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저자부터 인기영합에 따라서 인종차별적 요소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학을 떼는 비합리적 태도를 버려야겠습니다. 과학적 진실과 진리는 우리가 도덕적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히브리어는 문법적으로 원시언어인 포합어에 가까운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포합어는 한 단어 안에 주어, 동사, 목적어가 다 들어있습니다. 굴절어는 이보다 좀 더 진화해서 목적어와 주어를 동사에서 분리시키지만, 여전히 포합어의 성질이 남아서 동사가 주어에 따라 동사변화를 합니다. 히브리어 동사 안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헬라어 동사 안에는 주어가 들어있습니다.
포합어는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서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극지방, 열대지역 원시부족들이 사용합니다. 이로써 고대 인류는 최소한 신석기 시대까지는 본래 포합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포합어에서 유럽인들이 쓰는 굴절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는 언어 형태를 띄고 있어서, 언어 자체가 고대어 형태이며, 원시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목적어 앞에 붙는 “에트”는 한국어 목적조사 “을,를” 과 같은 기능으로 자주 나타납니다. 따라서 한국어가 포함된 교착어에도 히브리어가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포합어와 굴절어, 포합어와 교착어 사이에 있는 과도기적 언어입니다. 언어 발달의 최종단계는 중국어와 현대 영어처럼 문법이 대폭 생략되고 단어위치에 따라서 문법 성질이 결정되는 고립어입니다. 중국어는 단어와 발음이 어려울 뿐, 문법은 세상에서 제일 쉽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어는 언어 발달 상 원시부족어, 고대어에 가깝고 그에 따라 시제 또한 구체적이지 않고 단순합니다. 따라서 그 언어의 틀에 갇혀서 사람들의 생각 또한 충분히 제한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의 가능성을 저자가 단순히 도덕과 상대주의 관념으로 아예 막아버린다는 것 자체가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서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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