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사야
창세기에서 간간히 나타났던 전세계에 대한 구원 약속은, 요셉을 통해서 이집트와 중근동 가뭄을 해결하므로써 잠시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 구원 약속을 잊어버렸고, 혼합주의에 빠지다가 마침내는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는 극단적인 배타성을 띕니다. 그러나 이사야 서는 잊어버렸던 전세계 구원 약속을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사야 서는 불교 경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불교 경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관세음 보살, 메시아는 미륵불로 바뀌어 나타나며, 불교는 이사야서를 베껴서 여러 경전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몇 가지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시편9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요엘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이사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관세음보살 보문품경 선남자여, 만약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받드는 자는 설사 큰 불 속에 들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불이 글을 태우지 못하나니, 혹은 큰 물에 떠나려 가게 되더라도 그 명호를 일컬으면 곧 얕은 곳에 이르게 될 것이며
위 글을 보면 구약 성경 구절을 짜깁기해서 관세음 경전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을 쓴 다윗은 BC1040~970 사람이고, 이사야는 BC 790~739 사람입니다. 그에 반해서, 관세음보살 보문품경은 불교계 기존 주장은 AD 2C, 새로 끌어올린 주장은 AD 1C지만 실체적 근거는 없습니다. 시기적으로 비교한다면, 불교 관세음 보살 경전의 상당 수가 구약 성경을 베꼈습니다.
인터넷 포탈 사이트 다음에 있는, 한국 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따르면, 인도에서 조차 AD 3~6C에 관음신앙이 성행했습니다. 즉 한국 불교 주장과 달리, 관음신앙은 AD 3C 이후에나 생겨난 것입니다.
일본 학자 이와모또가 실지 조사를 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관세음 보살의 원형은 이란의 물의 여신이자 풍요의 여신인 아나히타가 간다라 지방에서 나나이야 / 아르드후쇼 여신으로 정착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타지키스탄에서 출토된 아나히타 여신상은 물병을 들고 있으며, 왼 손에 든 항아리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관세음 보살의 물병과 버들가지를 든 모습은 결국 이란의 여신을 베낀 것입니다.
본래 여신이었는데, 깨닫기 위해서는 남자여야 한다는 불교의 교리에 따라 잠시 남자로 바뀌었던 것인데, 워낙 여신으로서의 강한 전통과 많은 유물들이 전해지므로 어쩔 수 없이 다시 여성의 모습을 회복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교리를 세운 것은, 구약 성경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호하시고 도우신다는 시편과 선지서의 구절들이 대거 관세음 보살 경전에 그대로 베껴집니다.
더 나아가 같은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불교 미륵 경전에 대거 베껴집니다. 그래서 AD 4C, 불교에 미륵불의 내용을 담은 미륵6부경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부처가 산다는 서방정토, 인도의 서쪽에 있다는 나라는 바로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보살 개념과 경전들을 이스라엘의 구약 성경에서 그대로 베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 말씀을 갖고 다원주의자들과 이방종교들을 향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사야 42:7~8 에서 철저한 다원주의에 대한 반대와 이사야 63:1~6에서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가는 대적들을 향한 처절한 복수였습니다.
세상과 연합한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다른 고등 종교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으니, 그 이방종교들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담긴 것이니 전도는 필요없고 서로 화합하고 평화를 이루면 된다는 주장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지금 서구에서 사람들이 음란, 동성애로 가족해체가 이뤄지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소속감과 세상과 이방종교와 구별되는 뚜렷한 정체성을 내팽개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셨기 때문임을 환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다원주의에 대한 죄값입니다.
물론 더 근본적인 죄의 원인은 장 칼뱅과 그의 추종자들이 은사중단론과 기적중지론, 성경완성에 따른 예언중지론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앞문단에 예언된 짓밟혀 피가 튀기는 희생자들 속에는 세속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칼뱅주의자와 장로교도들이 대거 포함돼있습니다.
서울, 뉴욕, 파리 등등 전세계 대도시에서 사람들이 짓눌려 솟아 오른 피가 순식간에 강물처럼 밀려나와 건물을 적시는 장면도 보여주셨습니다.
앞에서 성부, 성자 하나님만 실컷 높이는 척하고, 성령 하나님을 말로만 꼬드긴 뒤 그 영광을 장 칼뱅이 홀랑 가져간 죄값입니다.
삼위 하나님 어느 분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성령 하나님은 초자연적 기적을 행하셔서 살아계심으로 영광 받으시는데, 다른 길도 있다며, 인간주제에 하나님의 길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장 칼뱅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덤볐다가 지옥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감언이설과 말 바꾸기 궤변에 속지 않으십니다.
24. 예레미야
죄를 숨 쉬듯이 짓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백년간 여러 차례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오래도록 기회를 주심에도 그 얘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람들은 멸망이 쉽게 다가오지 않자 하나님의 예언은 더디고 이뤄지지 않는 것이라고 비웃었습니다(하박국1:2~4, 에스겔12:22). 특히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해서, 자기들도 하나님의 환상을 봤다며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평강만을 줄 뿐이라는 예언만 해대므로, 사람들은 자기 죄악을 고칠 줄 몰랐습니다.
예레미야 20:7~12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예언을 비웃고 핍박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전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가족, 친척들조차 조롱과 핍박하는 무리 속에 섞여 있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주 실망했습니다. 그는 유다 왕국에 대한 중보기도보다는 심판 예언이 아예 이뤄져 버리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당대에 그 심판이 임하고 유다는 멸망합니다.
오늘 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큰 내용으로서, 기도원에서는 사람이 듣기 좋은 헛된 거짓 예언이 난무하고, 개신교 지도자들은 예언은 이미 끝났다고 주장하며, 예언을 이단으로 치부합니다. 개신교는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 날 전세계 기독교 현실과 그 당시 유다 왕국은 판박이 그 자체입니다.
한국 개신교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든 사람이 죄를 지적하면, “넌 안 더럽냐?” 라고 되묻기만 하지, 회개는 안 합니다. 렘20:10처럼 도리어 그가 넘어지길 바라고 그를 실족시키려고 꾀를 쓸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수백년간 참으셨으나, 결국 멸망시키셨습니다.
개신교 학자들이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지, 천주교 시대에도 수백년간 하나님께서 수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천주교에 경고한 역사가 있습니다. 단지 그들을 역사가들은 신비주의자로 치부하고 야사로 취급해버립니다. 그럼에도 말을 듣지 않아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한국과 개신교 또한 지금 당장은 평안하고, 지금 심판 경고 예언을 쏟아내는 선지자들은 이단 취급을 받습니다. 예레미야 서에 따르면 수백년이 걸릴 지라도, 선지자들이 쏟은 심판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게 요점입니다.
25. 예레미야 애가
역대하35:25에서 유다왕 요시아가 죽을 때, 예레미야가 애가를 지었다고 쓰여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요시야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일인 유다가 바벨론에게 함락당한 상황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잘 살펴보면 바벨론에게 함락된 후 꽤 오랜 시간동안에 나타나는 고통과정을 써놨는데, 실제로 예레미야는 43:6~7에서 예루살렘 함락후 얼마되지 않아 이집트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마침내 성난 군중들에게 돌에 맞고 죽습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는 요시아가 죽을 때 미리 유다의 함락 상황을 보고 쓴 애가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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