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전도 태도
개방성과 말씀 사이
166쪽에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라고 쓰면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열린 자세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167쪽에서 대조적으로 롬1:25, 살전1:9를 인용하면서, 이방인의 종교와 문화, 철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했음을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사도 바울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급진적 배타주의가 아니었다고 애매모호하게 서술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엣세네 파(딤전4:1~3)와 유대 율법주의(딤전1:7), 헬라 철학(골2:8)과 종교(딤후4:7) 및 가나안과 바벨론 종교를 비롯한 이방의 가르침(갈1:6~9)과 처절하게 싸웠고, 배타적이었습니다.
제가 하나 더 추가한다면, 사도 바울은 극단적 배타주의는 아니었지만,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혼합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67쪽에서 대조적으로 롬1:25, 살전1:9를 인용하면서, 이방인의 종교와 문화, 철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했음을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사도 바울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급진적 배타주의가 아니었다고 애매모호하게 서술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엣세네 파(딤전4:1~3)와 유대 율법주의(딤전1:7), 헬라 철학(골2:8)과 종교(딤후4:7) 및 가나안과 바벨론 종교를 비롯한 이방의 가르침(갈1:6~9)과 처절하게 싸웠고, 배타적이었습니다.
제가 하나 더 추가한다면, 사도 바울은 극단적 배타주의는 아니었지만,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혼합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융통성있고, 자유로운 사람이었으며, 우리가 자신을 비우고 예수의 종이 될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권능을 역사하심을 말했던 것입니다(빌2:6~11). 이를 저자는 융통성, 감수성, 공감으로 요약을 했습니다.
하지만 178쪽에서 저자가 “바울이 결코 회심을 목적으로 두지 않았다”고 마음대로 적어놨는데, 정확히 어떤 경전인지 적지 않고 절수만 적어서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회심을 목적으로 전도를 했지, 단순히 전도행위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기를 갈망했습니다. 저자는 아무래도 자유주의 신학자인 듯합니다. 그들의 성경왜곡과 아무렇게나 해석하는 방식은 분명히 거짓 증거하는 거짓 교사 노릇을 하는 것이며,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심판받을 일입니다 (벧후2:1).
하지만 178쪽에서 저자가 “바울이 결코 회심을 목적으로 두지 않았다”고 마음대로 적어놨는데, 정확히 어떤 경전인지 적지 않고 절수만 적어서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회심을 목적으로 전도를 했지, 단순히 전도행위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기를 갈망했습니다. 저자는 아무래도 자유주의 신학자인 듯합니다. 그들의 성경왜곡과 아무렇게나 해석하는 방식은 분명히 거짓 증거하는 거짓 교사 노릇을 하는 것이며,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심판받을 일입니다 (벧후2:1).
율법주의
이 시대에 전세계적으로 교회들의 움직임을 보면, 복음주의나 신비주의나 할 것없이 구약을 잘못 해석해서, 기독교인과 불신자들 사이에 아예 담을 쌓아놓고 만나지도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제사장이다. 세상의 타락한 문화에 물들면 안된다!” 이런 배타성은 랄프 네이버의 [셀교회 지침서]에 아주 잘 설명돼있습니다.
상당수의 교회들이 이런 배타성으로 전도의 길을 스스로 막고, 마침내 교세가 기울어진다고 합니다. 보통 교회들이 전도를 나가도 자기들끼리 음악 공연, 기도회, 설교회 정도만 하고, 불신자들과 전혀 교류없이 끝낸다고 합니다. 우리의 전도는 길거리와 생활 현장에서 불신자들에게 보여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광고 홍보하기 위함이지, 꼭꼭 숨어서 겸손한 척을 행위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상당수의 교회들이 이런 배타성으로 전도의 길을 스스로 막고, 마침내 교세가 기울어진다고 합니다. 보통 교회들이 전도를 나가도 자기들끼리 음악 공연, 기도회, 설교회 정도만 하고, 불신자들과 전혀 교류없이 끝낸다고 합니다. 우리의 전도는 길거리와 생활 현장에서 불신자들에게 보여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광고 홍보하기 위함이지, 꼭꼭 숨어서 겸손한 척을 행위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말씀으로 살지 않은 불신자들이 제 멋대로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는 홍익대학교에 다닐 때, 제게 다가오는 불신자 여학생들의 자유분방에 마구 화를 내며 정죄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매들이 스스로 내게 찾아와서 같이 교회를 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말씀을 몰라서 세속에 물들 수 밖에 없는 여대생들의 모습에 제가 정죄를 쏟아 부으며 거절했습니다. 그 때 저는 선택받은 의인이라는 착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학교 졸업 후에 시온 기도원을 갔었는데, 거긴 예언 은사 사역을 중심으로 하는 신비주의적 교회였습니다. 아무리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말씀을 하셔도, 그들은 예언은사가 있다는 특권의식으로 남을 돌아볼 줄 모르고, 지식주의와 불신자들 모두를 똑같이 야만인 취급을 했습니다.
“조상, 우상, 무당 세력등 귀신들이 들러붙은 기도원 바깥 사람들과 상종했다간 우리도 그 악한 세력에 눌린다”는 말이 유행을 했습니다. 당연히 전도활동은 거의 없었고 결국 교회는 망했습니다. 교만한 신비주의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 성경 말씀과 신학에 대한 무지를 감추기 위한 위장전술에 지나지 않았고, 도리어 자신과 남을 망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조상, 우상, 무당 세력등 귀신들이 들러붙은 기도원 바깥 사람들과 상종했다간 우리도 그 악한 세력에 눌린다”는 말이 유행을 했습니다. 당연히 전도활동은 거의 없었고 결국 교회는 망했습니다. 교만한 신비주의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 성경 말씀과 신학에 대한 무지를 감추기 위한 위장전술에 지나지 않았고, 도리어 자신과 남을 망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시온 기도원의 신비주의가 줄 수 없었던 교회 부흥의 참된 비결을 깨닫습니다. 우리 시대 교회들이 다시 부흥하려면 사도 바울처럼 열린 마음을 갖고 불신자들을 사랑과 용서, 인내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성령의 전(殿)이 되고 말씀의 제자가 되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특권의식, 율법주의를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게 바로 불신자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를 소개하고 그들이 의인으로 불리워지게 하는 것이며, 이야말로 참된 전도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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