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1일 수요일

#1 Lollardism - summary of text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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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 글은 2017년 11월 즈음에 작성해서, 어떤 교육기관에 제출한 글입니다. 나중에 한참 시간이 지나서, 아우터레위 사이트에 올려놨습니다.


중세 교회사
 
 
위클리프의 종교개혁과 롤라드 운동
 
  
서론
 
중세는 종교적 신본주의나 세속에서 인본주의 면에서 모두 타락된 암흑시기였습니다. 이 때 중세 교황주의 종교 이데올로기가 사회 모든 분야 뿐만 아니라, 사람 마음 속까지 전횡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인간 가치와 종교관 부실이 사회 전반에 걸쳐 진행됐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교황청이 유럽 여러 나라들에게 막대한 헌금과 세금을 뜯어먹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부패와 잘못된 관행을 지적한 사람들이 여럿 나타났는데, 이 책에서 다루는 사람은 위클리프입니다. 그는 농민들이 부패한 봉건사회에 대항하여 일으킨, 사회 개혁 운동인 롤라드 운동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본론
 
위클리프 활동시기의 시대적 배경
 
14세기 유럽은 흑사병의 창궐로 인구가 1/3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착취의 봉건사회가 전반적으로 무너지고, 사람의 가치가 올라갔습니다. 더 나아가 13세기 백년 가까이 이뤄진 십자군 운동의 연속적 참패로 로마 카톨릭의 교황권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세속군주와 카톨릭 교회는 유럽 농노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회 대중은 카톨릭에 대한 멸시, 조롱, 비판을 거세게 일으켰습니다.
 
그 중에서 영국은 프랑스와 백년전쟁에서 패배하여, 왕권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영국은 종교와 정치 세력 모두 국민들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고, 국민들은 점차 사회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그 시대적 깨달음을 구체적 사상으로 표현해준 사람이 바로 요한 위클리프입니다.
 
그레고리 11세는 영국 국왕 존에게 과도한 조공을 요구했고, 영국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 과도한 내정 간섭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카톨릭 교황이 보낸 자객에 영국인이 암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인들은 분노로 들끓었습니다. 이때 위클리프는 [세속통치론][교회론]을 저술하여, 카톨릭 재산을 영국 정부가 몰수하고, 세속적 왕권신수설을 옹호하고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했습니다. 이후에 위클리프는 기존의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서 가난한 국민들조차 성경을 읽도록 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위클리프는 농민들의 정신을 일깨웠고 농민들은 롤라드 운동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위클리프는 [고발] 이라는 책을 편찬하여, 카톨릭 사제들의 무위도식을 신랄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사제들이 실질적으로 일도 안 하면서, 가난한 농민들로부터 착취한 고혈같은 세금을, 사치와 향락으로 날려버리거나 로마 교황청으로 상납하는 데에 대한 통렬한 비판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오늘날 개신교를 돌아보게 합니다.
 
 
 
위클리프의 신학과 사상
 
위클리프는 브레드워딘이 일치하는 공로를 비난한 것과 다르게, “일치하는 공로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재(先在) 은총에서 나오는 순수한 은혜로 보상하실 때, 일치하는 공로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끼친 브레드워딘은, 어거스틴과 같은 반펠라기우스 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위클리프에게 예정과 은총이라는 사상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윌리엄 오캄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캄은 프랜시스 수도회의 일원으로서, 스콜라 신학의 실재론 사상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오캄은 교황권이라는 보편적 개념에 대립하는 주민권(공민권)을 지지했고,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라고 주장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이에 대해서는 좀더 온건한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권리에 있어서 오캄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파두와의 마르시글리오와 로버트 랭란드도 오캄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마르시글리오는 국가의 통치권은 국민에게 있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통치자요, 심판관인 왕은 국민의 대표자라고 정의했습니다. 랭란드는 영국 국민을 향한 사랑과 낭만적인 시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조는 옥스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옥스퍼드의 사조로 자리잡았습니다. 옥스퍼드 사조는 교황이 아닌, 국왕을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교황의 위협을 받았고, 국왕의 지원이 필요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종교적 권위의 근원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중세 교회에서는 교황의 권위, 종교회의의 권위까지 중시했었는데, 이 모두를 다 제거하고, 성경만을 종교적 권위로 봤습니다. 동시에 성경을 절대적 권위를 지닌 것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법 아래 고용된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상이 농민들로 하여금, 청지기의 기본을 벗어던진 영주와 왕권에 대항한 롤라드 운동을 일으킨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위클리프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은 당시 사람들이 쓰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므로써,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을 복음화 할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당시 영국인들이 쓰던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도록 그를 움직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일반 성도가 성경을 보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위클리프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고 진리를 직접 판별하도록 했습니다. 당시에는 인쇄기가 없었지만, 단기간에 영국 가정에 대량 보급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최후의 만찬에서, 빵을 자신의 몸으로, 포도주를 자신의 피로 말씀하시므로써, 신학자 라드베르투스는, 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뀐다고 화체설 이론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라트람누스와 버펜가리우스는 이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청이 강력한 이단으로 규정한 이후부터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성찬용 잔은 평신도는 마시면 안된다는 극단적인 교리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위클리프는 논리적, 과학적으로 부정을 했습니다. 화체설에 아예 반대를 했습니다. 영적 임재설같은 영적 비유와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교황권을 와해시키는 시초가 됐습니다.
 
중세 교회의 교회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교회를 거룩한 단체로 보았는데, 로마교회는 다른 교회들보다 우월성이 있다고 보았고, 교회가 천국과 같다는 개념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천국의 열쇠를 건네고 교회를 세우신다는 말씀을 근거로 삼아서, 레오 1세 감독은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에 갖는 공적 우월권을 확립시켰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같다는 사상은, 모든 기독교인은 의무와 행위가 교회에 예속돼야만 한다는 주장으로 굳어졌습니다. 교회의 규제에 속하지 않은 모든 생활은 다 세속적으로 천시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 및 은둔 생활을 훌륭한 이상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사상은 교회를 세속적으로 타락시키게 하는 주객전도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세상 왕국을 통치하다보니, 교회는 정치세력화 되므로써, 개인 영혼 구제에 관심이 덜했습니다. 그레고리 7세와 이노센트 3, 보니페이스 8세 때에는 이런 사상에 도취돼서, 서유럽의 황제와 교황이 서로 충돌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에 반하여 위클리프는 [교회론]이라는 저서에서, 교회는 예정의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의 모임, 가톨릭 혹은 사도적 교회는 예정된 자들의 우주적 교회로서 이미 죽은 자들, 살아있는 자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까지 포함된다으로 써놨습니다. 교회는 어떤 장소나 인간의 선택이, 어떤 사람을 교회의 일원으로 만들지 않으며 오직 신성한 예정으로 인해서, 인내하며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모든 세상적인 유익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썼습니다.
 
페이지가 분량을 넘어가므로, 이상으로 위클리프에 관한 요약을 멈추고 책 제목에 맞춰서 롤라드 운동으로 가겠습니다.
 
 
 
롤라드 운동
 
롤라드 운동이 일어난 원인을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14세기에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가 1/3로 줄어버린 상황에서, 노동자의 희소로 임금이 올라가므로, 기존의 농노제가 붕괴되고 임금을 받는 노동계층으로 평민들의 신분과 사회 제도가 바뀌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 봉건적 반동으로, 영주들이 기존 사회질서로 돌아가고자 해서 농민들은 동요를 했습니다. 이러한 동요 속에서 카톨릭 주교와 수도사들이 부재지주로서, 사회적 모범을 전혀 보이지 않고 세속 영주와 다를 바없는 탐욕에 찌든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위클리프는 백성들에게 균등하게 부의 혜택이 돌아가게 해야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대지배자이시다. 그는 영적 지배권을 교회에게, 물질적 지배권은 위정자에게 신탁하셨으므로, 그 위임자는 잘 관리하라고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권리를 악용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빼앗으신다. 따라서 기독교회나 성직자가 영지와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 밖에도 여러 사상을 썼는데, 쓸모없고 게으른 성직자들에게서 편안한 삶의 특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카톨릭의 지나친 부의 축재를 견제하는 주장이 많습니다. 그의 사상 이후, 와트 타일러를 주축으로 농민봉기가 영국에서 꾸준히 일어났습니다. 특히 봉건적 수탈이나 영주의 비행이 잦거나, 프랑스 함대가 출몰해서 영국 해안을 약탈한 시대였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놀라운 점은 대륙의 프랑스 함대가 섬나라 영국에서 해적질을 했다는 점입니다. 보통 섬나라에서 대륙으로 해적질을 하는 게 정상입니다. 롤라드 운동을 주로 이끈 지도층은 농촌과 도시의 하급 성직자들이었는데, 이 전에 위클리프는 가난한 설교자들에게 영어로 번역된 말씀을 전파하도록 훈련시켰으므로,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는 성경 말씀이 라틴어로만 다뤄져서, 로마 카톨릭의 최상층 및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위클리프 시대 이후부터는 영어로 해석전파되므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전국민이 공유하도록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의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점차 사회와 현실로 눈을 돌려서 부와 생산기반에 대하여 점차 민주화 의식이 발전을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 당시에 영주의 보호아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농민반란에 대해서는 편파적으로 영주 편만을 들어줬고 농민들의 항거를 폭압적으로 진압하는데에 사상적으로 빌미를 제공해줬습니다. 본래 독일 농민들이 항거를 할 때, 마르틴 루터에게 조언을 요청할 수 있었던 배경또한 영국의 위클리프가 영국 농민들을 외면하지 않고 정의를 구현하던 노력을 사람들이 기억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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