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중세 교회는 이노센트 3세 이후로 교권이 쇠락합니다. 십자군 운동이 거의 끝나갈 무렵 유럽은 동방 문화의 유입으로 개인주의 사조가 발달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장원의 해체와 상업과 도시의 발달로 봉건 제후가 몰락을 합니다. 이로써 왕권이 국가주의, 민족주의로 강화되면서 교황의 권위는 떨어지고 교회의 분열이 나타났습니다. 그로 인해 카톨릭은 개혁회의를 열게 됩니다.
본론
1장 교황권 쇠퇴의 배경과 원인
1편 교황권 쇠퇴의 사회적 배경
유럽 안에서 민족의식이 생겨났습니다.
13세기 말까지는 교회의 영적 주권 아래 세속 질서가 통치된다는 사상으로, 모든 유럽은 로마 교황청 아래에서 하나였으나, 14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영국과 프랑스를 선두로 외국인과 교황을 배척하는 국민주의 정서가 생겼습니다.
중산층의 계급이 강화됐습니다.십자군 전쟁이전에는 영주와 기사들이 너무 많아서 해외 영토를 찾아봐야 할 정도였는데, 전쟁 이후 상당 수가 죽었습니다. 한편 전쟁 통에 동로마와 이슬람 지역과의 교역이 활성화돼서, 상인이 증가하고 농민들의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적어져서 농민에 대한 대우가 좋아졌습니다. 동로마 지역의 고전 사상과 민주주의가 전해져서 개인주의와 현세적 관심 또한 발달하게 됐습니다.
교회법을 떠난 세속 법률의 연구가 많아졌다!동로마제국 사람들과 문화가 서유럽에 전해지면서, 로마 법전과 학문, 사상이 서유럽에 전해졌습니다.
교회 부패와 황제들과의 싸움교회 부패와 타락은 민심이반으로 이어져서, 교황과 교회의 권위가 추락했습니다. 여기에 전통적인 황제 및 왕들과 교황의 대립은, 유럽인들에게 종교적 전체주의에서 국민 국가 의식이 고취되도록 했습니다.
1편 교황권 쇠퇴의 사회적 배경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상황(1152~1254)은 잘리어 왕조가 끝나고 슈타우펜 왕조가 세워졌습니다. 초반에는 프리드리히 황제가 빅토르 4세를 교황으로 세워서, 로마 교황 알렉산더 3세를 제압했지만, 알렉산더 3세 로마 교황이 롬바르드 족의 힘을 빌려서 프리드리히 황제를 누릅니다. 그 이후에 프리드리히 황제는 3차 십자군 전쟁때 끌려가서 전사하고, 아들인 하인리히 4세가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남북으로 교황청을 위협하다가 갑자기 죽습니다.
알렉산더 3세는 바다 건너 영국의 헨리2세를 굴복시킵니다.
교황 이노센트 시대가 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오토 4세가 로마 교황청에 간섭을 하자,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인 필립을 지지하는 분열세력이 일어난 틈을 타서, 교황은 교황권을 강화하고 혼란과 독일과 프랑스 전쟁 결과를 갖고, 패전한 오토를 폐위했습니다. 교황 덕으로 독일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아들 콘라드 4세가 교황권에 연이어 도전했지만, 그 때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죽고, 콘라드 4세는 정복전쟁에서 실패하므로써 더 이상 교황권에 도전할 수 없었고 간섭조차 못했습니다.
한편 프랑스의 필립 2세는 이노센트 3세 교황 아래 놓였지만, 이노센트 4세 이후, 프랑스에서 우르반 4세를 따로 교황으로 옹립하면서 교황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습니다. 즉 신성로마제국에서 프랑스로 로마 교황에 대한 간섭이 넘어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필립 4세 때까지 이어집니다.
2편 교황 보니페이스 8세의 교권신장과 필립 4세 왕의 투쟁
필립 4세 때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돈이 필요했기에 성직자에게도 과세를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로마 교황 보니페이스 8세는 과세 금지령을 내리고 필립 4세를 파문시켰습니다. 그러자 필립 4세는 화폐수출 금지령을 내려서 이태리 경제에 타격을 줬습니다. 교황은 왕에게 굴복을 했습니다.
다음 투쟁은, 파미르 감독 버나드를 사신으로 프랑스에 보냈을 때, 필립 왕이 버나드를 반역죄로 투옥시킵니다. 그러자 교황은 사절의 석방을 요구하고 황제를 로마로 소환합니다. 필립은 1302년에 신분회를 열고 로마반동정책에 대해서 찬성표결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보니페이스 8세는 누구든지 교황에 복종해야 한다고 선포를 했습니다. 필립은 군대를 출병시켜서 보니페이스를 잡아 가뒀습니다.
보니페이스 8세가 죽고 베네딕트 11세가 교황을 계승했지만 8개월만에 죽어버립니다. 그러자 프랑스인 구츠를 클레멘트 5세로 선출합니다. 그는 필립 황제의 꼭두각시 교황으로 활동했고,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므로, 70년동안 프랑스 왕실 아래 로마 교황청이 귀속되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2장 교황권 약화와 중세 교회 대분열
1편 교황청의 바벨론 포로(1309~1378)
앞 편에서 서술한 클레멘트 5세 이후, 아비뇽에서 옹립받은 교황은 7명입니다. 이 당시에 이러한 일이 가능하도록 사상적 배경도 깔려 있었습니다. 세속의 왕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교황이 내린 게 아니라는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단테는 “교회가 국가를 침해할 수 없다!” 라고 외쳤습니다.
마실리어스는 [평화의 옹호자]라는 저술을 통해서, 교황과 황제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정교분리를 강조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3세 시절에, 영국인이 로마 교황청에 충성하기를 그만뒀습니다.
이상의 민심이반에 세금은 줄어드는데도 카톨릭은 사치스런 궁정생활을 멈추지 않아서, 로마 카톨릭은 자금을 충당하고자 교직 매매와 면죄부 판매를 했습니다. 이는 교황청의 분열을 불러들입니다.
2편 교황청 대분열 (1378~1417)
아비뇽의 마지막 교황 그레고리 11세가 급사하자, 이탈리아 사람들은 로마인이 교황이 되길 바랬습니다. 그래서 바리 감독 우르반 6세를 교황으로 선출했고, 그는 다시 바티칸으로 교황청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프랑스인이었던 추기경들의 악행, 사치, 방종을 신랄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추기경들은 제네바 백작을 클레멘트 7라 부르며 아비뇽 교황으로 옹립하므로 교황청이 나뉘었습니다.
우르반 6세는 로마인들의 직접 선거로 뽑혔고, 이탈리아, 독일, 영국이 지지했습니다. 반면 클레멘트 7세는 프랑스 추기경들이 선출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이 지지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 아비뇽과 로마의 바티칸이 서로 교황지상권을 주장하자, 유럽에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마침내 다시 교황청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개혁회의들이 연달아 소집됐습니다.
3장 개혁회의들 (1409~1449)
1편 피사회의 (1409)
분열된 교황청을 통합하기 위한 회의가 7~9월간 지속됐지만, 정작 아비뇽과 바티칸의 교황들은 불참했습니다. 이에 프랑스 교회법 교수인 콘라드가 신학자, 추기경, 주교, 수도원장, 평신도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두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밀란 대감독 필라제스를 알렉산더 5세로 새로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기존지지 판도는 큰 변동이 없었으며, 새로 뽑힌 교황은 10개월만에 급사를 했습니다. 룩센부르크 가의 시기스문드가 독일 황제가 된 후에, 요한 23세를 교황으로 승인하고 콘스탄스 회의를 1414년에 엽니다.
2편 콘스탄스 회의 (1414~1418)
신성 로마제국 황제 시기스문드와 요한 게르손, 제3교황이었던 요한 23세가 참석했습니다. 요한 23세는 자신을 지지하는 시인, 이탈리아 교회 감독들을 대거 참석시켰습니다. 1편 피사 회의와 같은 구성원에 5000 명의 대규모 인원이 참여했습니다.
3명의 교황 모두 퇴위시키고 새롭게 교황을 선출할 것과 교회 내부의 개혁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성경을 등한히 한 점과 교황청에 바치는 임명세와 중세 문제가 개혁의 중심과제였습니다. 그리고 요한 후스와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재판하는 점 또한 의제에 포함됐습니다.
회의는 감독단의 투표를 거부했고, 그러자 각자 자기를 지지하는 감독들을 대거 데려온 세명의 교황들은, 회의장을 빠져나갔습니다. 투표는 나라들에게 한표씩을 주고 추기경들이 한 표를 행사했습니다. 5월에는 요한 23세를 폐위, 7월에 그레고리 12세를 사임시켰고, 1414년 7월에 끝까지 버티던 베네딕트를 스페인과 스코틀랜드가 거부하므로써 퇴출시켰습니다. 그리고 마르틴 5세가 1427년에 새 교황으로 선출됐습니다.
교회 개혁을 해결하지 못하고 다음 회의를 5년 뒤에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7년 후, 그 다음부터는 매10년마다 회의를 소집하기로 했습니다. 교회 회의의 권위를 교황의 권위보다 우위에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3편 바젤 회의 (1431~1449)
후스당과의 협정 및 교회 개혁과 교리 문제에 대한 의결을 다뤘습니다. 후스당과의 협정 의결을 먼저 쓰겠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가 원할 때, 떡 밖에 포도주를 나누어 줄 수 있다.
성직자의 죄는 오직 교직자 회의에서만 판단, 정죄 할 수 있다.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은 감독에게만 있다.
성직자는 재산을 소유할 수 있으나, 청지기의 권한만 갖고 있다.
이상의 의결에 따라서, 보헤미아의 후스당은 로마 카톨릭에서 독립하지 않고 남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교회 개혁에 관한 의결을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황체제에서 회의 체제로 바꿔서 교회 행정의 민주화를 결의.
대교구는 2년 마다 모여서 교권의 남용과 성직자의 타락 여부를 시정하기로 결의
총회는 10년 마다 한번 씩 모여서 당면 문제를 논의
그러나 교황지지 세력들은 이를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몇가지 안건은 통과됐습니다.
교황의 전제권 축소
교황청 주관의 강제 징세, 임명세, 정기납세 폐지
성도가 교황에게 호소하는 상소권을 제한
추기경의 수를 24명으로 제한하며 각국에서 3명까지만.
성직자는 독신주의를 지키며, 교회 안에서 오락과 연극을 금한다.
마리아의 무흠을 결정
교인들의 도박, 댄스, 나체 미술전 금지
이러한 바젤 회의는 곧바로 재분열을 했습니다. 교황청에 현금으로 내는 세금을 회의에서 폐지하자, 교황과 교회 관계자들이 반대를 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교황청의 유지를 위해서는, 재정의 축소에 교황청 사람들이 반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터키가 동방교회와 동로마제국에 침입을 했고, 동로마제국의 황제 요한 8세는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 요셉2세를 시켜서 서방 교회의 니케아 감독인 베사리온을 플로렌스 페라리에서 만나 협상하게 했습니다. 교황파는 그 협상에 응하여, 플로렌스의 페라라 회의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개혁파들은 바젤에 남아서 하던 회의를 지속하므로써, 로마 교황청 세력들은 다시 갈라졌습니다.
회의 결과에 따른 주변 유럽 나라들의 영향을 쓴다면,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 전쟁 중이었는데, 잔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는 승리하고 왕권강화로 이어져서, 교황은 프랑스에 내정간섭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바젤회의가 프랑스를 위한 법을 만들어버립니다. 이 상황은 프랑스에서 칼뱅이 종교개혁을 발전시키는 토대를 제공해줬습니다.
반면 독일은 국내의 분열과 황제권 약화로 인해서, 교황청의 간섭에서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점이 독일 국민에게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눈을 뜨게 했으며, 훗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각 지방 영주들이 열렬히 지지하게 만들었습니다.
서로 다른 상황이 결국은 종교개혁의 토대가 됐습니다.
3편 플로렌스 회의 (1438~1449)
플로렌스 페라라에서 회의를 하던 교황당과 동방 교회 사절들은, 쌍방합의를 하고 동서 교회를 통합하기로 의결을 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서방교회의 성령론과 동방교회 대감독들의 권위와 예배 의식을 서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동방 교회에서 지속되던 감독과 사제의 결혼도 인정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1493년 7월에 동서방 교회의 연합을 선포했고, 유게니우스 교황의 권위가 높아졌습니다.
서방교회는 연옥설을 인정하되, 동방교회 주장을 받아들여서, 불이 영적이라고 규정했고, 성찬식은 누룩에 있든 없든지 가능하다고 결정했습니다.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화체설과 교황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감독을 필두로 동방교회 성직자 대부분이 이 결의를 반대했고, 서방교회의 개혁파들 또한 교황을 파문했습니다. 그리고 사보아 백작 아마데우스를 펠릭스 5세라고 이름붙이고 교황으로 즉위시켰습니다. 전임교황의 죽음과 신임 교황의 사퇴로 전혀 다른 사람이 니콜라스 5세로 교황이 됐고, 동로마제국에 대한 지원 약속은 사라졌습니다. 1453년 동로마제국은 쓸쓸히 터키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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