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3일 토요일

일본식민사관과 한국인의 뿌리 찾기


글쓴이: 임원주 (스토리텔링 작가, 저서:  허왕후 스토리텔링)

안녕하세요? 
항상 즐거우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일본식민사관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거짓역사입니다.
일본식민사관에서는 한국은 중국의 식민지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고,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가야지역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은 독자적인 뿌리가 없는 민족이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은 일본식민사관을 만들어 일제강점기에 사용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는 한국인에게 슬픈 역사이고, 일본식민사관은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대한(韓)민국의 뿌리는 대한(韓)제국과 삼한(韓)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람들은 삼한의 역사를 대단히 낯설게 느낍니다.
차라리 서양의 로마역사를 삼한의 역사보다 친근하게 느낍니다.

삼한의 역사를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낯설게 느끼는 것은 삼한의 역사가 일본식민사관으로 지워졌고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대한제국의 뿌리인 삼한역사를 철저히 지우고 왜곡 하였습니다.

제가 오늘 일본식민사관을 벗어나게 해드리고, 한국인의 뿌리를 찾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먼저 다음 두가지를 힌트로 드립니다.

첫째, 일본식민사관이 주장하는 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일본은 한국의 고서적을 철저히 감추고, 한국 고대역사는 기록이 없다, 유물이 없다, 설화다, 검증되지 않는다라고 소문 내었습니다.

둘째, 한국은 황금이 많이나는 지질 때문에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었다는 것입니다.
지질과 고대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입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식민통치 목적으로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사편수회에서는 16년간 100만엔을 투입하여 조선사 35권을 만들었습니다.
조선사는 신라 사로국 시대 3권, 통일신라 1권, 고려시대 7권, 조선시대 24권, 총 35권입니다.
조선사는 신라 박혁거세왕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삼한의 역사는 기록조차 없습니다.

삼한의 고서적은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가져갔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나오는 삼한의 기록들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만들어서 믿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식민사관 때문에 현재의 초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삼한의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꼭 알아야 할 삼한의 역사는 일본식민사관 때문에 배우지 못하여 한국인은 삼한의 역사를 모릅니다.
삼한시대의 사적지와 유물은 역사의 사각지대가 되어 한국관광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국현 대구세계문화엑스포 이사장은 일본식민사관으로 훼손된 삼한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에 평생동안 노력 하였습니다.
조국현 이사장은 삼한의 유적지(삼한시대 추풍령휴게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삼한대처(三韓大處) 김천고을~~로 시작하는 김천중고등학교 교가를 6년간 불렀습니다.
공군장교 생활을 하다가 삼한에 대한 연구를 하기위해 제대(소령) 하였습니다.

조국현 이사장은 마치 에베레스트에 등산가를 안내하는 셰르파처럼, 삼한의 역사와 유물을 1988년부터 30여년간 가이드 하였습니다.
조국현 이사장은 30여년 동안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삼한의 소도를 5곳 발견 하였고, 가이드북 5권을 출판하였습니다.
1988년부터 1,000여회 이상 한국 고대역사 탐방 가이드를 하였고, 100회 이상 세미나를 하였습니다.

다음의 글은 조국현 이사장이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삼한의 역사를 심화학습한 자료 중 일본식민사관과 관련된 것입니다.

1. 국립대구박물관 고대문화실 유물

A. 일본식민사관의 피해 

국립대구박물관에는 중세문화실과 고대문화실이 있습니다.
중세문화실은 불교가 신라에 공인된 시기(AD 527)부터의 유물이고, 불상과 불교유물이 많습니다.
고대문화실의 유물은 대부분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한국 고대 민속종교의 의기(儀器, 종교의 용품)입니다.
일본식민사관에서는 한국 고대의 민속종교를 알지 못하였고, 샤머니즘(무속)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하였습니다.
일본식민사관 때문에 국립대구박물관 고대문화실의 유물을 미신적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저도 국립대구박물관 고대문화실의 유물을 미신적인 것으로 착각하였고, 유물을 보는 것조차 싫었습니다.
저에게는 저자신도 모르게 일본식민사관이 머리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B. 조국현 이사장의 해설

삼한시대 금호강변에 군장(君長, 군수급의 정치인)이 경북 경산시에서 압독국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천군(天君, 이스라엘 레위지파 제사장)이 대구광역시 동구지역에서 미리(美里)라는 소도(도피성)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삼한시대에는 향신료 무역으로 바다의 실크로드가 있었고, 이스라엘 제사장이 한국에 왔었습니다.
삼한시대에 이스라엘 제사장이 사용하던 히브리어 알파벳이 국립김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삼한시대 제사장은 금호강변 무덤에 타임캡슐을 묻었고, 출토된 유물이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도마가 천군이 다스리고 있던 미리에 와서 치성화(雉省火)라는 제철소를 세웠습니다.
AD 4~6세기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한국 고대 기독교인이 묻은 타임캡슐입니다.
삼한시대 문화는 세계 최고의 문화였고, 한국인은 최고 문명인 이었습니다.

2. 국립김해박물관 유물

A. 일본식민사관의 피해: 아픈 역사 속에서 밝혀진 사실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였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한반도에 수많은 유적을 발굴하였습니다.
근대적인 고고학 조사방법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목적은 식민지 통치의 명분을 찾고, 한민족의 우수성을 훼손하고, 임나일본부 같은 잘못된
고대사의 증거를 찾기 위해 한반도 각 지역을 조사하였습니다.
가야유적 가운데 김해조개더미, 함안 말이산, 고령 지산동, 창녕 교동유적을 발굴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학문적 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발굴과정이나 출토유물에 대한 기록이 허술하였습니다.
이때 이루어진 조사는 오히려 한국고대사와 가야사를 연구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우리손으로 조금씩 가야유적을 다시 발굴하면서, 가야에 대한 실마리들이 하나 둘씩 풀어지고 역사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 참고: 위 글은 국립김해박물관 전시실 입구 설명판에 있습니다)

B. 조국현 이사장의 해설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로 1907년 김해조개더미를 일본인이며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 전신) 교수였던 이마니시 류(今西龍, 수제자 이병도)가
발굴하였고, '김해패총'이라 하였습니다.
김해패총은 임나일본부의 근거자료를 찾을 목적으로 6차례 발굴하였으나 근거자료가 없었습니다.
김해패총에서 중국 신나라 왕망이 발행한 화천(貨泉, AD 14년)이라는 동전이 발견 되었습니다.
김해패총은 무덤이 아니라 길이 120m, 너비 30m, 높이 6m의 조개로 만든 성(城) 이었습니다.
화천의 유통기간 등으로 추정해보면 김해조개더미는 사도 도마와 김수로왕이 주변의 조개무덤을 옮겨 성으로 만든 것으로 경남 김해시 봉황동유적지에
있습니다.
봉황동유적지는 사도 도마가 인도 공주였던 허왕후를 김수로왕에게 중매하여 AD 48.7.27(음력) 혼인식을 한 곳입니다.
※ 참고 blog.naver.com/story4006

3. 국립경주박물관 고대유물

A. 일본식민사관의 피해

일본의 한국고적 조사사업은 1915~ 1935년까지였고, 조선고적도보 15권을 조선총독부가 발행 하였습니다.
조선고적도보는 고구려 2, 백제 1, 통일신라 2, 고려시대 4, 조선시대 6권으로 총 15권이고, 삼한은 없습니다.

일본의 한국고적 조사사업은 보물찾기식으로 진행되었고, 발굴보고서 없는 발굴로 유적이 훼손되었습니다.
정식으로 발굴하면 3~4년 걸릴 것을 비전문가들이 3~4일 걸려 마구잡이로 유물을 찾았습니다.
또한 연구목적이라며 유물을 일본으로 반출 하였습니다.
일본이 조선고적도보를 만들면서 일본식민사관에 유리한 사료만 편집 하였습니다.
일본의 한국고적 조사사업 때문에 한국의 고적은 전국적으로 훼손되었고, 유물은 도굴되고 밀반출 되었습니다.

B. 조국현 이사장의 해설

국립경주박물관의 본관 유물은 불교가 신라에 공인되기 전의 유물과 이후(이차돈의 순교비부터)의 유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경주 대릉원의 큰 무덤들은 불교가 공인되기 전(AD 4~6세기)의 것으로 한국고대기독교의 유적입니다.
황남대총에서 총 58.441점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이중에 1세기 이스라엘의 헤브론에서 만들어진 로만글라스 유리잔(보물제624호)은 예수님의
제자 사도 도마가 한국에 가지고 왔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한국고적 조사사업 때 전국적으로 고분이 도굴되고 훼손되었는데, 황남대총은 워낙 큰 고분이고 도시의 중앙에 있어서 보존 되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유물을 타임캡슐처럼 무덤에 넣었습니다.

4. 경북 의성군 삼한시대의 조문국

A. 일본식민사관의 피해

일본식민사관은 조선총독부 초대총독 데라우치부터 적용 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 명령하여 도별로 전국에 있는 고서적과 희귀본을 수집 하였습니다.
고서적 51종 약 20 만권을 불태웠고, 20만권(추정)을 일본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데라우치 총독은 일본 모교에 한국 고서적을 기증하여 데라우치 문고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식민사관에서는 '한국은 독자성이 없는 야만민족이고 타율적 민족이었다. 그러므로 문화민족인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다스려야 한국인이
행복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식민사관은 일본이 국력을 총동원하여 만든 국가 프로젝트였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를 하면서 긴기간 조직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일본식민사관은 알게 모르게 지금도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B. 조국현 이사장의 해설

일본식민사관을 벗어나려면 삼한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에 있는 도서관에 근무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고서적 중에 삼국사라는 책이 있어서 필사하였고, 한국에 가지고 왔었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삼국사 중에서 의성군 조문국에 해당하는 부분만 책으로 조문국박물관에서 출판 하였습니다.
의성군청 학예사의 소개로 책을 받고 읽어보니, 이 책에 삼한시대 소문국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에 기록된 소문국의 왕대력은 21대왕 369년 이었고, 삼국사기에 조문국은 AD 185년 신라에 멸망 하였습니다.
특히 경덕왕(금성산고분 1호분)은 그동안 전설로만 알았는데 삼국사를 통하여 재위연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경덕왕의 소문국 재위연대가 AD 10~74년이고, 예수님의 제자 사도 도마가 한국에 왔었던 역사적 시기와 동시대의 왕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참고: 召文國을 지명으로 읽을 때는 조문국, 역사로 읽을 때는 소문국으로 발음) 

5. 경북 청도군 삼한시대의 이서국

A. 일본식민사관의 피해

일본은 한국 민족에게 필요한 고서적은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가져갔고, 식민사관에 필요한 기록은 실증주의 사관이라며 가르쳤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남겨두고 가르쳤는데, 이 또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라는 일본식민사관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일본보다 1,000년이 뒤진다고 하였습니다.
삼국사기의 신라 초기는 삼한의 시대였고 내물왕(재위 AD 356~ 402년) 때부터 신라의 왕권이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삼한의 소국들이 2번 멸망한 기록들을 보아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삼국사기를 자세히 읽고 연구하지 않으면 일본식민사관에 속고맙니다.
일본식민사관은 한국인이 한국고대사를 대하면서 불신이 생기고, 보기 싫어지고, 민족적 열등감이 생기도록 치밀하고 교묘하게 계획하여 만들었습니다.

B. 조국현 이사장의 해설

경북 청도군은 삼한시대 군장(君長)부터 현재의 군수(郡守)까지 같은 곳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삼한시대만은 군장(정치인)과 천군(레위지파 제사장) 2사람이 각각의 장소에서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군장은 AD 42년 멸망(삼국유사)하고, 천군은 AD 297년 멸망(삼국사기) 하였습니다.
일본식민사관에서 이서국의 2번 멸망기록이 잘못된 기록이라 하였으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정확합니다.

6. 경북 김천시 삼한시대의 감문국

A. 일본식민사관의 피해 

일본식민사관의 목적은 일본인은 주인처럼 살면서 한국인을 노예처럼 부려먹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지하자원 중 황금이 탐이 났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부터 한국에 금이 많이 생산되는 것을 알았고, 경북 김천시 봉산면 상금동 금화마을에서 금을 채굴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1930년에는 한국이 세계 3위의 금생산국 이었습니다.

B. 조국현 이사장의 해설

고대에는 사금을 채취하여 황금을 생산하였는데, 사금은 지구에서 한국의 경상도(육성층 퇴적암)지방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삼한시대 금(金)자가 들어간 지명에는 고대의 하천에 '모래반 물반'이었을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주는 고대에 금성(金城)이라 불렸는데 국립경주박물관의 고대유물에는 금관을 비롯한 황금유물이 대단히 많습니다.
의성군 금성(金城)면에 조문국이 있습니다.
김천(金泉, 조선시대는 金山)은 금을 퍼올리는 샘이라는 뜻으로 고대부터 황금산지였습니다.
김천에 삼한의 감문국이 있었고, 교통의 요충지였던 도마의 숨결(삼한시대의 추풍령휴게소)에 삼한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은 김천시 봉산면 상금동 금화마을에서 금을 확보하였고, 김해에서 금관(金官)가야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고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지름길은 황금과 향신료의 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하여 한국과 서양과의 교역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경주(사로국), 의성(조문국), 김천(감문국)에서 황금이 생산되었고, 김해(金海, 金官가야)에서 수출 되었는데 낙동강의 배가 운송
하였습니다.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하여 황금과 향신료의 동서양 심부름은 유태인이 하였습니다.
김천시 봉산면은 이전 이름이 황금소면 이었습니다.

황금소(黃金所)가 기록된 고지도가 있는데, 봉산면 직동에는 일제강점기의 금광과 금방앗간이 있었고 해방이후까지 운영 되었습니다.

김천시에서는 삼한시대의 감문국 유적지를 156억원 예산으로 2020년까지 발굴복원하려고 계획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사중 삼한시대의 유적이 추가로 발견되어 완공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김천시 감문국 유적지 복원과 때를 같이하여 도마의 숨결(삼한시대 유적지 이름, 삼한시대의 추풍령휴게소)을 정명남 역사발굴 관광자원화
연구소장이 2020년 발굴복원하고 경상북도 도청에 자료를 보냈습니다.

도마의 숨결에는 삼한시대 소도(도피성)의 솟대가 발굴복원 되어 있습니다.
솟대를 처음 만든 사람의 묘(김천 문당동 1호 목관묘, BC 3세기, 청동검 등이 출토)가 인근에 있습니다.

도마의 숨결에 예수님의 제자 사도 도마가 한국에서 만든 돌절구통이 전시되어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추진(경상북도 도청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도마의 숨결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한국에 왔었던 사도 도마'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한국사 교과서 역사부도의 사도 바울 전도로 옆에, 한국에 왔었던 사도 도마의 전도로를 넣어서 초중고등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7. 맺는 말

일본식민사관은 대한제국과 삼한의 역사를 왜곡하였습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인은 독자적인 뿌리가 없는 야만 민족이므로 일본인이 계몽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식민사관을 사용하였습니다.
일본식민사관의 후유증은 현재도 남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초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삼한의 기록이 거의 없고, 대한민국 국민중에 삼한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삼한의 유적지와 유물이 대한민국 관광의 사각지대가 되었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습니다.

대(韓)민국과 대한(韓)제국의 뿌리는 삼한(韓)입니다.
삼한의 역사를 6하원칙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삼한의 군장(君長, 정치인, 군수)과 천군(天君, 제사장, 종교 지도자)은 각각 다른지역의 지방자치 단체장이었습니다.

언제: BC 400년 ~ 기원전후 (국립대구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의 연대표)

어디서: 삼한(마한, 진한, 변한) 78개 소국의 면적은 현재 남한의 면적과 같았습니다.
(마한 54개 소국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진한 12과 변한 12개 소국은 경상도)

무엇을: 삼한에는 78개 소국들이 있었는데, 1개의 소국은 현재 군단위 지방자치단체와 같고, 삼한의 전체대표는 마한의 목지국에서 뽑혔습니다. 

어떻게: 삼한의 소국들은 두레(협동조합)였습니다.
천군은 농사, 무역, 제사, 5월과 10월 절기를 관장 하였습니다.

왜: 제사장이 정치인과 대등하게 각각의 지역을 다스린 것은 세계 역사상 이스라엘의 도피성과 삼한의 소도(도피성) 뿐입니다.
현재의 남북한처럼 삼한과 고조선이 있었습니다.

삼한과 고조선은 1개 나라였고 2개의 다른 문화였는데, 동전의 양면과 같았습니다.
삼한의 문화는 당시대 세계 최고의 문화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초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삼한의 역사 자료가 대폭 추가되어야 합니다.
(※ 참고: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연구자를 응원합니다.) 

2021. 2. 12.
위 글을 전달하는 사람: 대구세계문화엑스포 이사장 조국현  010 4391 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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