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교회사 13주차
자유주의 신학
19C에 진화론이 등장하여 과학주의가 주도권을 잡게 되어, 신학에서 고등비평이 나타났다. 알버트 리츨이 신칸트주의를 주장하고, 종교는 체험이라는 주장하는 슐라이마허가 나왔다. 사회주의가 혼합돼서 사회복음도 등장하고, 이단인 유니테리언 주의가 등장했다.
이들이 복합적으로 형성되어 1905년 미국에 자유주의 신학이 태어났다. 예수그리스도의 기적과 동정녀로부터 탄생을 부정하는데, 1974년 월남전 패망 때까지 미국에서 대유행을 했고, 미국 장로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침내 미국 장로교는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게 됐다.
Old School(개혁신학 칼빈주의)은 약해지고, New School(찰스피니, 알버트 반즈, 리만 비철의 실천적 펠라기우스 주의를 수용)이 강해져서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개정하고, 공식적으로 개혁신학을 포기하고 알미니안 신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1990년 이후, 미국 장로교는 동성애, 종교 다원주의, 여성신학을 포용하여, 교회답지 않는 교회로 바뀌었다.
한국 장로교단 중에도 이 영향을 받은 교단이 있는데, 기장, 고신, 통합 이다. 1924년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선언에 1200 여 명의 목회자들이 가담했다. 이들은 프린스턴 신학교를 중심으로 했기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사람들이 떠나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다.
1935년 존 맥케이 프린스턴 학장이 칼 바르트 신학을 받아들여서 1967년에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작성했고, 김재준 박사가 이 학교에서 유학한 결과 한국에서 기장 교단을 세웠다. 한경직 목사도 바르트 신학에 영향을 받아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서 장로교단을 분리시켜서 통합 교단을 세웠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신사참배가 가능한 신학적 탄력성의 배경이 됐다.
하지만 초창기 한국의 1884년도 선교부흥은 올드 스쿨이 중심이다. 한국 선교사들을 보낸 프린스턴 신학교가 뉴욕대부흥의 영향을 받았었는데, 뉴욕대부흥의 신학은 올드스쿨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사용하지 않았었다.
자유주의에 반대해서 근본주의가 일어났지만, 신학적 틀에 박혀 있는 게 아니라서,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가 협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근본주의에 반발한 운동이 신복음주의 운동으로 다시 일어나 과학에 대한 개방성을 추구했다. 그 결과 사회 인문 과학이 신학 안에 방법론으로 들어와 현장중심의 신학으로 탈바꿈했다. 그 결과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와 신복음주의의 공동의 적이 되므로, 자유주의와 신복음주의는 같은 성질을 갖게 됐다.
미국은 구학파와 신학파의 무조건적 통합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대거 흘러들어왔고, 교단 안에서 이단시비가 들끓게 됐는데, 특별히 고등비평이 화제거리가 됐다.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독재로 보고, 인간의 가치와 영적 능력에 확신에 강조를 둔다.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따라서 불교, 이슬람, 유교 등 이방종교를 믿든간에 길이 다를 뿐 결과는 같다는 식으로 말한다. 때문에 교회에게 신사참배의 핑계를 부여해준다.
알브레트 리츨을 포함한 독일 신학은 19C에 이미 좌경화됐고, 하나님의 사랑을 핑계로 보편적 사랑만 강조하고 공의의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을 부정한다. 1902년 미국 장로교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의 해석 및 10:3의 유아기에 죽은 자에 대한 해석을 포함한 상당 수의 신조를 개정한다. 그 밖에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누락시켰다.
다시 말해서 개혁주의, 칼빈주의를 버렸다는 뜻이다. 따라서 1884~1907년에 활약했던 한국 선교사로 온 미국 사역자들은 이러한 미국 본토의 신학 변질 이전 사람들이라서 자유주의에 감염되지 않았었다.
1924년 어반 선언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찬동하는 1200명의 목회자들이 등장하고 프린스턴 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변경되므로, 1929년 메첸은 프린스턴을 떠났다. 1936년 존 멕카이가 프린스턴의 교장이 되고 여성 장로 안수를 가능케 했다. 메첸은 1936년에 장로교를 떠나서 새로운 교단 OPC를 세웠다. 1938년 김재준은 조선신학교를 자유주의 신학으로 물들어서 기장으로 바꿔버렸다.
유럽대륙은 과학주의에 기반을 둔 고등비평이 휩쓸어서 교회 안에 자유주의자들이 많아졌다. 뉴욕시 제일 장로교회의 헤리 포스딕은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하며, 동정녀 탄생, 성경무오, 그리스도의 재림 등의 교리가 기독교의 근본교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기독교의 초자연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에 대해서 그래샴 메첸이 격렬히 투쟁했다. 게알더스 보스는 메첸에 동의했지만, 현실적 이득 때문에 프린스턴의 자유주의 신학에 순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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