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의 독신주의 비판
성령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남자들이 거절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딸들을 성령의 종들이라도 받아주길 원하셨습니다. 성령의 종들은 다른 종들과 달리 하나님과 교제하니까 받고 섬길 만한 준비가 돼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그 아픔과 상처를, 거절당한 딸들이 보듬어 주면서, 그 딸들로부터 진실한 사랑을 체험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세상 안목의 정욕 질서에서 벗어난 딸들의 진실한 마음을 봐주길 원하셨습니다.
남자들은 정욕을 채워주지 못하는 그녀들의 외모에 진저리를 내면서, 그 딸들의 진심을 외면하고 알려고 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늘 외롭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천주교, 카톨릭의 독신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다른 데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썼는데, 배경은 카톨릭의 본 고장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이었습니다. 봉사활동을 나온 신부와 수녀를 사랑한 일반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제게 전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하나님을 사랑해서 나와 결혼했다고 거짓말 늘어놓지 말고, 가서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버려진 자들과 결혼해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는데, 내가 그들의 숨겨진 욕구불만을 모를 줄 아느냐? 어찌 사람이 성결하게만 사느냐? 숨 쉬고 먹고 자고 싸고 살 수 있듯이 성욕도 채워야 하지 않겠느냐? 그 욕구를 내가 만들었다. 육체적 호불호 신호가 있어야 생명체가 유지되고 대를 이을 수 있지 않겠느냐?
진정 너희가 나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결혼하지 못한 내 자녀들을 결혼시켜줘라! 아무도 그들을 원치 않는다면 너희가 가서 결혼해라! 말로만 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위선 떨지 말고, 자식을 결혼시키지 못해서 가슴 아파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염려하는 나 하나님의 아픔을 너희가 풀어줘라!
성욕을 비현실적이고 이상한 신비주의로 해결하게 해달라는 기도하지 말아라! 혼자 괴물 우상이 돼서 뭐 하겠느냐?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도와가며 살아라!”
더 나아가 핍박받던 속 사도 시대에서 기독교 공인 이후 교부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적 상황도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속사도 시대는 현대 개신교처럼 각 가정 혹은 가정 연합체들이 교회를 자율적으로 세우고, 독립적으로 이끌고 아무 간섭없이 재산을 관리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속사도 시대의 지하교회, 가정교회, 지방분권적 독립 교회들의 재산을 모두 로마 교회에 관료적으로 복속시키다보니 재산 상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본래 각 가정들이 독립적으로 관리하던 교회 재산들을 중앙 교회에서 몰수하는 부작용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현직 목사와 감독들이 죽으며 교회 재산을 뺏기니, 목사와 감독의 아내와 자식들이 당장 길 바닥에 나앉게 생겨서 줄 소송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로마 교황이 성직자에게 독신을 강요하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제54강 신부와 사제독신 |
십자가의 삶을 살아라!
못 생기게 태어난 자매들,
교회 안에 율법주의로 성형수술과 화장도 못하게 옭아매서 추한 상태로 고통받는 자매들,
세상에서 한 때 날렸던 늘씬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였으나 세상의 풍파에 맞고 사람에게 이용당해서 나락에 빠진 자매들,
도대체 사방이 모두 막혀서 하늘만 뻥 뚫려있는 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도움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정욕과 세속적 욕망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이뤄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오누이 모두, 세속적 욕망과 높은 눈, 자존심을 버리고 순종할 때에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마귀적 욕망을 십자가에 죽여야, 예수 그리스도가 누린 부활의 은혜와 기쁨을 삶 속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잠21:4에 따르면 눈이 높은 것 자체가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서 명예, 권세, 부유함을 얻지도 누리지도 못하고 고생만 들이킨 저로서는, 예수님 믿어서 뭐가 좋은 지 몰랐습니다. 사람들에게 왜 전도를 해야하는지 조차 몰랐기 때문에 늘 거절해왔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뭘 얘기하시는지는 머리로는 환상을 받기 때문에 잘 알지만, 육신의 고난을 워낙 많이 받다보니, 적개심이 들끓어서 늘 거절합니다. 1983년 서울시 관악구 난곡동에서 예수님께서 6살이던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지금 어린 너로서,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너는 이해하지 못할거야. 네가 성인이 됐을 때의 이야기니까! 아들아! 앵무새로 살지 말아라! 너는 내 말씀을 받아서 머리로는 내 뜻을 잘 알지만, 삶은 그렇게 살지 못할 거다!”
“나 하나님의 매질만 피하기 위해서, 전해준 말씀을 의무적, 사무적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 할 일 끝났다고 손 털고 돌아서지 마라! 평생 그 말씀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라! 그게 바로 너희 시대 신학자들이 그렇게 떠받드는 완전축자 영감설의 핵심요체 이니라!”
야고보 1:22~26
한 마디로 설교와 예언, 계시를 전하는 사람은, 본인이 가장 먼저 그 말씀에 굴복, 회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교회 목사님들이 세상 사람들의 죄악을 지적할 때도, 자신부터 고침 받고 설교하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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