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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중세 교회 개혁과 교황권 강화
서론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 카톨릭은 혼란 속에서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군사적으로 보호를 해주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인정해주지도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로마 카톨릭은, 유럽을 지배한 게르만 이민족들에게 적극적인 전도를 했고 마침내 그들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복속했습니다.
한편 유럽에서는 게르만족 이동 뿐 만아니라, 노르만 족, 마자르 족, 불가르족, 슬라브 족들의 여러 유럽 인종의 지속되는 이동과 침략, 북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를 통한 유럽으로 들어오는 이슬람 세력으로 인해서 외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불안정한 지방분권 세력들의 반란또한 잦아서 안정된 권력기반이 필요한 유럽의 왕들은 민심의 대부분을 장악한 로마 카톨릭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로마 카톨릭과 유럽의 황제, 왕들의 결탁이 이뤄졌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사이에서 알력이 일어났고, 부패와 타락,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사회분위기가 수백년간 준비됐습니다.
6장 교황권의 강화와 10장 교황권의 쇠퇴가 그 내용을 잘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6장을 쓰겠습니다.
본론
중세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교회의 권위가 유럽인들로부터 사라지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고자 일어난 중심지가 클루니 수도원입니다. 부패와 타락에 대한 교회 자체의 개혁으로 좋은 출발에서 시작했지만, 교회를 다스리는 황제권에서 독립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1장 수도원과 중세교회 개혁의 배경과 과정 (955-1093)
1편 개혁 배경으로 정치사회적 상황
신성로마제국의 발흥으로 중세유럽은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으로 세력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독일에서 신성로마제국이 세워졌고, 오토 1세는 중앙집권적 봉건 국가를 세워서, 황제권을 강화시켰습니다. 반면 교황은 이태리의 제후와 기사들이, 로마의 추기경들 중에서 자기 마음대로 교황을 세우고 내쫓으며 조종을 했습니다. 교황은 첩을 둬서, 데오도라 라는 여인에게 휘둘린 이후부터는 유럽 민심을 잃었습니다.
제국의 황제들도 오토 이후부터는 로마 교회 내정에 간섭을 시작했고, 교황 및 감독의 임명권을 좌우했습니다. 잘리어 왕조의 하인리히 2세는 카톨릭 주교들의 영지를 봉건 영주 아래에 두었습니다. 잘리어 왕조의 3대 하인리히 3세는 독일을 통일한 뒤에, 중앙집권을 강화했습니다. 비록 레오 4세의 반항이 있었지만, 교권추락으로, 60명의 성직자들이 황제의 제후 반열에 속하게 됐습니다.
2편 중세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운동
클루니는 정치적 지배력이 아닌, 모범적 생활과 하나님의 감화력으로 수도원을 자정하는 데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베르노 초대원장이 죽은 뒤 5~6개의 수도원들이 합세했습니다. 제후들의 잦은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하자, 6대 수도원장 오딜로가 신의 휴전을 제안했지만, 아무도 들어먹지 않았습니다. 이후 교회 권위가 추락했음을 절감하고, 원인은 성직자와 교황청에 있으며, 개혁방향은 카톨릭 내부의 자정과 사치 배격으로 바뀌었습니다. 교직 매매와 부당한 금전관계인 시몬(행3:18~24)과 성직자의 결혼, 축첩 - 니콜라탄이즘(계2:6)을 파기하기로 선언했습니다.
교직매매가 11세기 중엽에 만연한 독일 황제가 평신도를 교직에 임명하는 관례와 맞부딪혔습니다. 당시 하인리히 3세가 황제권을 강화해서 교황청에 정치적 섭정을 하던 때입니다. 그래서 당장은 이룰 수 없었지만, 후일을 기약하게 됩니다.
3편 교황 레오 9세의 개혁 시도와 정책
교회의 추락된 권위가 교회 내부의 부패에 있음을 깨닫고 개혁을 했습니다. 독일, 프랑스 대륙을 순회하며 종교회의를 열어 교권확립을 위한 정치력을 발휘했습니다. 평신도의 교직 매매, 성직자들의 결혼을 정죄했으며, 1049년 랭스 종교회의에서 성직자, 시민들의 선거없이는 어느 누구도 교회의 주요직에 오를 수 없도록 교회선거법을 제정했습니다. 따라서 신성로마제국황제가 함부로 교회요직을 좌우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레오 9세 전의 추기경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 복종하는 자들이어서, 레오 9세는 3명의 개혁적 성향의 추기경들을 새로 등용했습니다. 로레인의 수도사 훔벌트는 레오 9세의 개혁정책에 적극적인 추진자였습니다. 힐데브란트는 로마교회 감독구 재무 행정을 담당했으며, 후에 그레고리 7세로 교황이 됩니다. 마지막 위그는 나머지 2 추기경을 반대하며 20년간 대립합니다.
그 밖에 동로마 교회와 재연합정책을 추구했으나, 동로마 황제 미카엘의 숙부 바르다스의 문제로 더 갈라지기만 했습니다. 후에 동로마 황제가 노르만의 침입을 받고 적극적으로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로마 교황청에 따르기도 했지만, 결국 동로마 구원계획은 실패하고, 오히려 레오 9세가 노르만에게 포로가 돼서, 고생하다 죽었을 뿐입니다.
2장 그레고리 7세에 의한 교황권 강화
1편 생애와 활동
AD 1015년에 소아나의 투스카니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힐데브란트입니다. 사제가 된 후 클루니 수도원에서 활동했으며, 주후 1046년에는 그레고리 5세와 같이 독일로 유배됐다가, 교황이 다음 해에 죽자, 1049년 레오 9세 교황과 함께 로마로 돌아갑니다.
2편 개혁파 선구자인 추기경으로서 교황권 강화
개혁은 앞장에서 늘 반복되듯, 성직매매, 성직자 결혼금지이고, 추가적으로 롬바르드 로마귀족들의 교황청 지배권 탈피,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주장하는 교회의 봉건 예속인 서임권과 왕권신수설에서 독립해서 교권을 세우는 것입니다.
롬바르드 귀족들이 그들의 측근 베네딕트 10세를 밀어붙이자, 신성로마제국 섭정 모후 아그네스의 승인을 얻어, 교황 니콜라스 2세를 세워 베네딕트 10세를 쫓아냅니다.
레오9세 교황을 괴롭혔던 노르만 족들을 편으로 끌어들이고, 롬바르드 귀족의 반대편인 민중당과 연합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성직자 임면권에 반대지지를 얻고, 독일 황제의 교권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니콜라스 2세가 죽은 뒤에는, 친구 안셀름을 알렉산더 2세 교황으로 세워서, 롬바르드 족이 섭정 태후 아그네스의 승인을 받아 세운 호노리우스 2세 교황후보를 물리칩니다. 하나님의 역사인지 신성로마제국 내부에서 혁명이 일어나 황제권이 약화되고, 어린 왕 하인리히 4세의 보호권자인 퀼른의 안노 감독이 개혁파에 힘을 실어줬기 때문입니다.
노르만 족들의 해외 원정과 영국과 시칠리아 정복을 승인해줍니다. 그리고 영국 교회를 카톨릭 교구 아래에 두게 됩니다.
3편 교황 즉위 후 교권 강화 및 실패
힐데브란트는 그레고리 7세로 교황이 된 후에, 성직자의 임면권과 교회토지의 재산권을 영주, 국왕에게서 빼앗아 교황의 아래에 두었습니다. 더 나아가 교황이 국왕을 지배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마침내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싸우게 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40%의 땅이 수도원장의 소유로 돼있어서, 교직 서임권 은 제국 운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결국에는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교황에게 파문을 철회해달라고 비는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레고리 7세는 선택과 정책이 왔다갔다 방황하다가 마침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반격을 받고 교황에서 쫓겨나서 객사했습니다.
도로 교황권은 약화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권이 강화됐습니다.
3장 황제권과 교황권의 투쟁 (1119-1198)
1편 그레고리 7세 이후 교회와 교황
빅토르 3세는 그레고리 7세가 죽은 뒤, 몬테카지노 수도원장이었던 데시리우스입니다. 그레고리 7세의 추종자들이 세운 교황입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가 바로 쫓아냈고 병으로 죽었습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라그래이의 추기경 오토입니다. 반대파에서 따로 세운 교황의 견제로 로마 입성을 못했습니다. 독일 성직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로마 교황청에 입성했지만, 남 이탈리아로 다시 쫓겨났습니다. 또 노르만의 군사력으로 다시 로마에 들어와서, 하인리히 4세의 심복인 클레멘트 3세 교황을 쫓아냈습니다. 터키의 침략으로 클레르몽 회의에서 십자군을 조직하고 파병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동서교회의 연합을 강조했습니다.
교황 파스칼 2세는 라벤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클루니 수도원에서 성직자로 자라났습니다. 하인리히 5세의 대관식을 거부해서, 2개월간 투옥된 후, 황제의 성직자 임면에 대해서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감독들이 맹렬히 반대하므로, 조약 파기와 하인리히 5세를 파문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황제가 로마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자 황제의 요구를 모두 들어줬습니다. 그 다음에는 앞서 독일 감독의 반대에서 시작한 과정이 되풀이 되고 완전히 황제에게 패배합니다.
2편 교황 갈릭티우스 2세와 황제 하인리히 5세의 대립과 보름스 조약
기존에 황제와 교황이 성직자들을 서임하는 부분이 엎치락뒤치락 했지만, 전체적으로 함께 하는 구조였습니다. 교황 갈릭시투스 2세가 1119년 랭스회의에서 임직권을 이용하여 하인리히 5세를 파문했고, 바바리아의 귀족들은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 보름스에서 국회를 열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교황의 전권행사의 야욕은 다시 좌절되고 그 전보다 더 심한 황제의 권한 강화가 이뤄졌습니다.
3편 교황 알렉산더 3세와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대립
신성로마제국에서 프리드리히 1세가 슈타우펜 왕조를 새로 열면서 전 신성로마제국 영토를 강력히 통일하고, 더욱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시켰습니다. 이에 한 발 더 나아가 모로니 대학의 교수에게 황제권의 근거를 찾도록 하면서, 고대 로마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고, 교회의 국가 예속이 진행됐습니다. 게다가 빅토르 4세를 교황으로 내세워서 로마 교황청에서 지명된 알렉산더 3세를 무효화시켰습니다. 또한 5 번에 걸쳐서 로마에 출병을 했는데, 4번째 때 역병, 5번째 때 롬바르드족의 군사력으로 레그나노에서 황제는 교황에게 굴복했습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3번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다가 1190년에 사망합니다. 그 아들 하인리히 6세는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점령하여, 교황청을 남북으로 둘러싸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황제의 요절로 교황청은 위기를 모면합니다.
4편 켄터베리 대주교와 영국왕 헨리 2세의 대립과 투쟁
신성로마제국과 같은 상황이 영국에서도 발생합니다. 영국왕은 브리튼 왕국 안에 있는 모든 영토에 대해서 국왕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었으나, 켄터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베키트는 이에 대해서 반발을 했고, 프랑스로 망명까지도 했습니다. 교황의 중재로 베키트는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영국왕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을 당했고, 영국 국민들의 동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헨리 2세는 베키트에게 성자칭호를 수여하고, 영국 교회들을 감시하는 클레런던 법을 폐지했습니다.
5편 이노센트 3세의 교황권 강화 정책
이노센트 3세 교황은 그리스 철학에서 주장한 바와 같은, 정신이 물질을 지배한다는 이론을 기독교에 접목하여, “베드로에게 온 세계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을 줬으므로, 교황이 온 나라를 지배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을 헌신적으로 섬기지 않으면 왕이 될 수 없다” 고 주장을 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 당시에는 교황을 섬기지 않은 이슬람이 동로마 제국 영토 대부분을 장악해서 그의 이론은 틀린 내용으로 증명됐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죄 때문에” 라티오네 페키티를 주장하여, 교황이 유럽의 모든 왕들 위에 군림을 했습니다. 당시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십자군 전쟁 도중 사망,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는 열병으로 요절했는데, 이를 로마 교황에 반대하는 죄의 원리라고 주장하며, 정치에도 써먹었습니다.
그렇게 유럽 각국들에게 교황이 내정간섭을 해서, 교황권을 강화하는 사건들이 당시에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탈리아 남부를 교황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독일의 분열된 황제 권력을 이용했습니다. 프랑스 왕의 이혼에 대해 철회하도록 요구했습니다. 레온왕에게 근친혼을 금지했습니다. 아라곤 왕을 교황의 가신으로 삼았습니다. 영국왕 존을 교황에게 굴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이후부터 교황에게 세금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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