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잘 보내셨습니까?
탈 원전 주장의 뿌리는 ‘탈핵’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할 수도 있는 원자폭탄을 없애자는 평화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독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독일 본에는 ‘릴케연구소’가 있습니다.
기존의 힘의 균형에 의한 국제질서에 반기를 들고, 노벨상에 대칭되는 ‘반 노벨상’을 제정 운용하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목소리이긴 하지만, 의미 있는 발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탈핵 론 기치를 호기롭게 내걸었던 독일의 생태평화주의자들은 ‘탈핵’ 주장은 현실성이 없는 이상론적인 구호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핵무기는 한편에서는 무기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쟁 발발 抑止(deterrence)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버나드 브로디는 핵 억지력이 특정 상황에 대해 항상 예비 되어야만 핵이 전쟁무기로 절대 사용해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토머스 셸링은 1966년 억지력에 대한 저서에서 승전의 관점에서 전쟁 이론이 더 이상 특정 관념으로 정의될 수 없다고 밝혔으며, 대신 강압력, 억지력을 통하여 전력이 동등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비전력이 준비되어 있는 상태에서 전쟁은 억지효과가 가장 크다고 하였습니다.
핵무기가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되는지, 위협이 되는 지는 서로 의견이 상충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실한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북한은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이 원자력 발전을 하고 있는 한, 큰 위협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승인이 떨어지기만 하면 6개월이 채 안 걸려 원자폭탄을 제조할 능력이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은 원자폭탄제조보다 상위에 있는 기술입니다.
북한이 원자력 발전을 못하는 이유는 기술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원자력 폐기물을 모아 플루토늄을 제조할 수 있고, 핵 융합기술을 가미하여 수소폭탄도 만들 수 있습니다.
자주국방을 꿈꾸었던 박 정희 대통령이 원자력 발전에 매달렸던 또 다른 이유입니다.
한국의 탈 원전 광풍을 가장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는 북한과 중국입니다.
한국에서 원자력 발전이 사라지면 북한의 핵은 엄청난 위력을 갖게 됩니다. 한국은 북한에 쩔쩔 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에 있다고, 미국이 우리를 적극 도와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중국은 屈起산업의 대표선수로 원자력을 지목했습니다.
한국이 늘 꺼림직 했습니다만, 지금은 업어주고 싶도록 고맙습니다. 노 났습니다.
세계의 나라들은 고도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원자력 산업분야에서 중국을 못 미더워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앞으로 200基가 넘는 원전을 건설하겠다는 것도 자국의 에너지 전환 필요도 있지만, 건립 경험을 쌓아 세계의 에너지 시장을 제패하겠다는 야심이 깔려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의 탈 원전 정책의 최대 수혜자입니다. 강력한 경쟁자가 스스로 꺼꾸러졌으니 날마다 화장실에 가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탈 원전을 주창하고 있는 환경운동가나 이를 국가정책으로 채택한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의원들이 속이 있고 철이 있는 사람들인지, 주판알이나 튕길 줄 아는 사람들인지 알 수 가 없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접한 원자력을 없애고 바람과 태양을 이용해 전기발전을 하면 더없이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장밋빛 환상에 젖어 이 탈 원전 정책을, 때마침 일어난 원자력 사고를 백으로 동원하여 추진했다는 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거의 틀림없을 것입니다.
원자력이 두렵다는 것은 실제는 전혀 딴판입니다.
그렇게도 문제를 삼는 안전성도, 환경성도, 경제성도, 다른 에너지원은 원자력과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우라늄 1g의 열량을 내려면 석탄 3000kg이 필요합니다.
원자력은 과학의 승리요 신비입니다. )
한국의 원자력은 원자력 선배 분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절대로 국민의 생명에 손상을 가할 수가 없습니다.
지진이 만약에 일어나면 원자력 발전소로 피신을 가야 합니다.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는 원자력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은 기어이 원자력을 없애야 세상사는 맛이 나거나 출세하는 길이 열리는 이들에 의해 각색되거나 조작된 정보입니다.
https://youtu.be/w77SFM7Fksc
■‘원자력 없애기’는 어떤 이들의 이념과 주장이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일까요?
우리나라만큼 이념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무기로 쓰이는 나라는 잘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과학기술은 정치에 휘둘려서는 언 됩니다.
문재인 정권 들어 한 나라의 에너지 정책이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다루어진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원자력 없애기를, 국민의 힘 지지자들은 원자력 살리기를 지지하는 것도 슬픈 코미디입니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파와 관계없이 선입견도 고정관념도 없이 누가 이 나라의 번영과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에너지 정책을 펴는 가를 감시견의 눈으로 살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놈들은 그 날부터 마음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에너지 같은 중요한 문제를 정략적으로 다루는 이들은 혼 짱 을 내주어야 하고, 바로 즉시 정치의 무대에서 퇴장시켜야 합니다.
몽둥이찜을 해서 끌어내려야 합니다.
사기꾼이나 판단력 빵점의 멍 충이 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원자력 없애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념에 빠져 단단히 무장되어 있는 아이들입니다.
세뇌되어 있어 좋은 말을 아무리 해주어도 안 듣습니다.
책이나 자료도 연구논문 등 객관성이 있는 자료는 안보고 찌라 시 정보만 보고 듣습니다.
오다가다 풍문으로 얻어들은 지식이 전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원자력을 없애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래 세 부류의 이념론자들의 주술에 세뇌되어 있습니다. 로봇처럼 조종당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도 민주당의원들도 탈핵을 침을 튀겨가며 떠들어대는 이들 모두 다 마찬가지 신세입니다.
한 부류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궁핍해져야 자연의 소중함을 알고 자연을 함부로 개발하지 않는다는 퇴행적 환경주의자들입니다.
진짜로 배고파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추위와 배고픔에 울어보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 나라 산림의 황폐화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땔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환경의 최대 적은 가난입니다.
몇 일간만 이 추운 겨울 에너지가 끊기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https://youtu.be/qt_OkgSOrkU
에너지 복지는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중동의 사막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전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기를 최대한 값싸게 생산하여 가난한 분들에게는 무상으로 공급하겠습니다.
그들은 철부지 낭만으로 자신을 폼 내고 있는 책임감 없는 자들입니다.
둘째는 미국 중심의 NPT(핵 확산 방지조약)체제에 대한 반대와 공격을 위해, 일단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개발과 사용부터 반대하고 보는 냉전 시대적 진영논리입니다.
자신들이 평화의 사도처럼 행세합니다. 지독한 이상 론 자들입니다. 평화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입니다.
세상과 나라에 대한 책임감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셋째는 기존의 화석연료 發電업계 및 그들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자들입니다.
정부 보조금을 기반으로 한 ‘신재생에너지’를 이상적으로 여기게 된 21세기형 환경 소비자주의자들입니다.
여기서 셋째 부류의 사람들은 거대한 화석연료 그룹, 석유나 LNG 판매 기업 등으로부터 배후조종 당하며 지원을 받기도 하는 그룹으로서 신념화 된 코어그룹은 아닙니다.
석유나 가스가 원자력으로 대체되면 화석연료업자들은 시장 전체를 잃지만, 신재생으로 대체되면 재생에너지 간헐성으로 시장의 반만 잃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엉뚱하나 실제로 소신으로 무장된 사람들은 둘 째 그룹에 속하는 이들 중 첫 번째 맹목적 자연보호 생각이 신념화 된 사람들로서 원자력을 악마 화 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핵심그룹입니다.
일본에서 활동한 미국의 극좌 환경운동가 C. 더글라스 러미스가 쓴 <경제성장이 안된다고 우리는 풍요롭지 못한가?> 나
앞에서 언급한 독일 본의 릴케연구소에서 나온 <희망을 찾는가?>같은 책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이념이 없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어이 변명할 거리를 찾아냅니다.
자존심을 끝까지 세웁니다.
그들은 박정희가 산림녹화운동을 열심히 했던 것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박정희가 산림녹화운동을 할 때 아카시아 나무를 심어서 한반도 고유종이 다 말라죽었다.
아카시아는 일본 나무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다.
작년도에 광주에서 전교조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켰던 일이 친일 음악가가 작곡한 교가를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친일 잔재 청산이라면 자다가도 번쩍 일어나는 민족문제연구회 등이 주관이 되어,
이 세상에 가장 정의로운 일을 하는 양 요란하게 일을 벌였고, 지역의 언론사는 응원부대라도 되는 양 부추겼습니다.
저는 이 분들이 하는 일이 엉터리라고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
제가 좋아하는 선구자 가곡이 일본 군가에서 따왔고, 조두남 선생이 친일 앞잡이 라는 것을 무턱대고 주장하는 것을 본 뒤부터였습니다.
선구자 가사 어디에 친일의 의도가 깔린 부분이 있습니까?
홍난파 김성태 선생님 사정도,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입니다. 마음 약한 분들이 두들겨 맞고 짓밟히고 그래서 협조한 척 한 것입니다.
광주일고는 용감하게도 교가를 바꿨습니다.
이은상 작사 이흥렬 작곡의 옛 교가를 임을 휘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이 짓고 광주일고 재학생들이 작사를 했습니다.
제가 볼 때는 교가의 작품성이나 음악 수준이 옛 교가가 바둑으로 치면 단 수준이라면 새 교가는 3,4급 수준입니다.
나는 섬 집 아이, 어머니의 마음을 작곡한 이흥렬 선생님이 지어 준 광주일고 교가 어디에 친일의 색채가 있다는 것인지 몇날 며칠을 연구해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치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짓기는 하였으나, 행여 데모에 관여하여 신세 망칠 까 군대로 입대해버린 김종률 작곡가는 비겁한 놈으로 간주되어야 합니까?
그 노래 제작에 관여했다는 황석영이는 518 때 무얼 했습니까?
자신이 친일 음악을 엉터리로 가려내어 못 부르게 하는 것을 인생의 최대 업적인 양 떠벌리고 다니는 민족문제 연구소 지부장이나 전교조 출신 몇 분들,
참 한심스럽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친일 작곡가가 만들었다고 못 부르게 하면서, 자신은 왜 돼지 목 딴소리로 김성태 선생님이 작고한 ‘이별의 노래’는 부르고, 난리 부르스 입니까?
그것도 삼절 까지. 왜 친일파로 처단해야 한다면서 노래는 3절까지 부르냐고요. 꼴 보기도 싫다면서요.
광주출신 김연자 노래를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은 한국인입니까, 일본인입니까.
김연자를 이용하고 단물 빼먹고 차버린 남자는 한국인입니까, 일본인입니까?
걸 그룹 ‘카라’ 나 ‘투 와이즈’를 일본인과 한국인 중 누가 더 사랑해줍니까?
시인 윤동주나 의사 안 중근을 공부하는 분들이 한국이 많습니까, 일본이 많습니까?
원자력에 대한 편견을 이야기 하려다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다음 글은 “이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드려도, 기어이 원자력을 없애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라는 주제로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탄의 은총 가득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