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로마 시대에 미움받는 기독교
p.59에서, 호교론자들이 했던 말이 쓰여 있습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고 단지 자기가 ‘기독교도’라고 고백한 것 뿐인데, 당신은 왜 이 사람을 벌했는가?"
호교론자가 했던 말의 이유와 근거가 된, 로마인이 기독교를 미워했던 요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 경제적 측면은,
- 이방 종교와 관련된 생계에 타격을 입기 때문
-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순수성을 위해서, 직업 제한, 군복무 기피, 세상 문화와 단절
- 종교적 측면에서, 기독교에 대해 악의적으로 와전된 소문의 효과가 컸습니다.
- 타키투스의 역사 5권에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예배드린 여호와 하나님이 당나귀 머리로 묘사 돼있습니다.
- 성만찬의 빵을 어린 아이, 포도주를 아이의 피로 잘못 퍼졌습니다.
- 남녀가 색욕으로 비밀의식을 치룬다는 소문
- 로마 경제계의 근간이었던, 노예제도에 대한 위협
- 기독교가 탄압을 받고 있는 상태이라서, 같은 처지인 노예들에게 전도가 잘 됐습니다.
- 기독교리 자체가 소외되고 낮은 자들에게 동등한 인권대우가 있었습니다.
- 로마는 이 기독교를 노예제 해체와 반체제 사상의 위협으로 봤습니다.
박해의 정치적 측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 유대의 세속적 메시아 사상에 따른, 잦은 로마에 반기와 봉기
- 구약 성경에 적힌 다윗의 자손이 메시야라는 기록
- 이상의 이유에서,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라는 인식
- 기독교도의 로마에 대한 반 국가관
- 로마의 국가종교에는 로마의 공직자와 군인이 모두 참여해야 하므로, 기독교도는 로마의 공직과 군대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 로마의 국가 종교는 많은 이방 신과 사람 황제를 신으로 추대해서 예배하는 것이라서, 기독교에서 볼 때는 우상숭배입니다.
- 넓어진 로마 영토에서, 주변 여러 이방 겨레들과 나라들의 잦은 로마 침략으로, 점차 높아지는 국가 존속에 대한 위기 의식이 국가에 협조하지 않는 기독교도들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났습니다.
- 로마 군부들의 잦은 반란으로, 황제의 신격화 필요성이 대두됐는데, 이는 기독교의 우상숭배와 상충하므로, 기독교는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세속적 신으로 군림하길 바라는 로마 황제와 구약의 성취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충돌
박해에 대한 종교적 측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 로마는 종교 관용 정책으로 다신교를 숭배했지만, 기독교는 유일신관으로 서로 대립했습니다.
- 로마의 쇠락 속에서,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로마의 고대 종교 부활을 추진 중이었는데, 기독교가 걸림돌이 됐습니다.
- 이교도적이거나 교회종파 분리자들이 추구했던, 자발적 순종으로, 기독교가 로마에 대해서 보다 더 전투적이고 반항적인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이상으로 기독교는 로마와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로서, 처음에는 서로 좋게 대해주려고 양쪽이 모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양 쪽 모두 타고난 대립적 특성과 로마 외부와 내부에서 지속되는 사회변화와 자극으로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게 됐습니다. 이 책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에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로마와 기독교의 충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세상의 질서를 굴복시키고자 붙인 것이다! 너희 사람들이 아무리 조심하고, 상대를 배려하며, 인본주의적으로 서로 양보하며 다툼을 피할 수 있다고 노력하더라도, 나 여호와가 뜻한 바대로 결국은 밀려들어가서 서로 싸울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에는 세상이 나의 가르침에 굴복하게 만든다! 다른 종교처럼 어영부영 넘어가지 않는다.”
그 다음에 먼저 불교의 가르침을 보여주셨습니다. 시냇물과 강물이 물길을 이루며 흐르는데, 그 물길은 땅이 약한 부분을 따라 이리저리 굽이 쳤습니다. 북방(北方) 불교의 선종(禪宗)이 “물 흐르는 대로 살라! 세상과 다툴 필요가 없다!” 라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경허(鏡虛) 선사의 무애행[無礙行]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승려 자격으로, 여자랑 동침한 게 그리 죄악인가? 이보게, 보살은 중생의 필요를 보살피고 자비를 베푼다네. 그 여인이 외롭고 남자가 필요해서, 내가 보살행으로 그녀의 필요를 채웠을 뿐이라네!”
그리고 악마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데에 충실한 자신의 종을 위해서, 갖가지 기적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이방 종교인들이 그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동양의 종교인, 도가 사상가들, 특히 노자는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流水不爭先 - 흐르는 물은 앞서기를 다투지 않는다” - 老子 道德經 제8장
上善若水. 가장 훌륭한 것(善)은 물과 같다.
水善利萬物而不爭, 물은 만물(萬物)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居善地, 거하는 곳마다 거기가 곧 좋은 땅인 줄을 알며,
心善淵, 마음은 깊은 연못과도 같고,
與善仁, 베풀어 줄 때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言善信, 말은 언제나 신실함이 넘치고,
政善治, 최선의 다스림을 베풀고,
事善能,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動善時. 움직일 때는 때를 따라 잘 살핀다.
夫唯不爭, 故無尤.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므로 허물이 없구나.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훗날에 네가 어른이 되면, 동성애와 다원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 기독교가 나뉠 것이다. 구약의 구별성, 순수성, 엄격함, 비타협, 축복과 징벌에 대비되는 신약의 사랑, 자비, 포용, 용서, 헌신과 희생 - 이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 나 하나님의 모습이냐? 왜?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이 다르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 그럼, 요한계시록 대로, 666 짐승의 표를 받으라고 세계정부에서 압력을 넣으면, 다른 종교들은, 세상과 다툴 필요없다는 가르침에 따라 아무 거리낌 없이 받을 것이다. 너희 기독교도 사랑과 평화,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똑같이 타락할 것이냐?”
그 다음에 제게 말씀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위 말씀을 보면, 관용적 기독교인들의 주장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세상가치와의 투쟁에 대한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우리가 아무리 세상과 타협하고, 개신교단이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더라도, 또는 개신교단이 성령훼방을 교시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 엎어 버리시고 결국은 세상과 기독교가 싸울 수 밖에 없게 만드십니다.
현재 유럽 기독교는 전멸하다시피 망했습니다. 그런데 은사와 계시 중단론, 성경시대에 이미 선지자와 사도가 끝났다는 가르침은 모두 유럽에서 만들어진 이론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높아지고 싶어서, 저 마다 선지자, 사도라고 이름을 드높이며 혼란을 일으키니, 신학계에서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음을.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도 예루살렘에 12문(門)이 적혀있고, 성경 4복음서와 요한 계시록에는 12 사도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이끌어가시는 것을, 사람이 성경을 유추해서 신학이란 이름으로, 자기 마음대로 결론을 내고, 하나님까지 사람의 마음대로 속박시키는 것은 분명한 월권행위라고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미국도 개신교는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90~80%를 넘기던 초창기 미국 기독교(개신교+카톨릭) 인구 비율이, 지금은 60%대로 떨어졌습니다. 상당 수가 무신론과 이방 종교로 바뀌었는데, 종교 이탈과 이민자들의 유입 급증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은 한국 차례입니다.
이미 미국은 한국이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를 한 것과 똑같이, 오바마 정권 아래에서, 이슬람과 동성애, 다원주의에 무릎을 꿇었고, 동조 변절했습니다. 미국의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연합체를 포함하여, 상당 수의 교단과 신학교들이 버락 오바마와 미국 민주당의 압박에 못이겼습니다. 그런데 그 교단들과 신학교들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은사자들을 신비주의자라고 매도하며 탄압하던 주축 세력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유학과 이론적 본부였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제3위 성령 하나님을 멸시한 죄값을 갚으십니다. 유럽이 무너졌던 것처럼, 세계 개신교 본부라는 미국을 무참히 짓밟아서, 오늘날 미국의 개신교단 지도부는 교단과 신학교 보호 핑계 아래, 변절자들만 남았습니다. 그들의 천국행은 현재로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고, 현재 진행형입니다. 마치 일제해방 후의 한국 개신교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앞서 인용한 33절의 말씀에 따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부인하겠다고 제게 분명히 말씀하시며, 전하라고 시키셨습니다. 변절했던 기독교인들이 천국에 가는 길은, 죽기 전에 미친 듯이, 거리 앞에 나가, 방송으로도, 하여간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오직 성경 말씀만이 진리이고, 우리는 세상의 압력에 굴복해서 타협한 것 뿐이다! 우리가 잘못됐다! 하나님, 우리가 죄인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했고, 성경 말세 예언에 따라 성경을 변개했나이다!”
라고 외치며, 사람들의 몰매와 돌팔매를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 갑니다. 평안한 곳에서 혼자 조용히 회개하는 것은, 말씀에 따라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로마서 10장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서 경북 예천 외가댁에서 1985년, 서울시 관악구 난곡동에서 1983년 즈음에 다음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술로 시인하는 것을, 평안하게 입으로만 예수님을 믿는 게 전부인 줄로 착각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구절이 뜻하는 바는, 기독교인들을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외쳤기 때문에, 돌팔매로 맞아죽거나, 콜롯세움에서 십자가에 달린 채 배가 갈려서 창자가 주르륵 흘러나오거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나와 사자 떼에게 물어뜯기거나, 끓는 물 속에 던져지거나, 피부 가죽을 다 벗겨서 방금 벗긴 염소가죽을 뒤집어 쓰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와 중에도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며, 평안한 표정으로 죽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생태계를 만드셔서, 초목들이 자라게 하고, 그 초목들을 초식동물이 먹게 했습니다. 그래서 초목들이 비정상적으로 많아져서 땅에 양분이 줄어들어 공멸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육식동물을 창조하셔서 초식동물의 수를 조절하니, 숲과 초원이 황폐해지지 않고 보존되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하나님은 잔인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육식동물에 죽어가는 초식동물의 뇌 안에서 마약성분의 진통제와 환각제를 넣어서 고통을 극심하게 느끼지 못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죽어가는 성도들의 고통을 감하시고, 그들의 눈에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과 함께 서서, 팔을 벌리며 빛을 발산하며 맞아주시는 장면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눈물과 감격 속에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깔깔 거리며 비웃는 로마인들 중에서, 점차 마음에 감동감화를 받고 뜨겁게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동성애, 혼음, 간음, 배신, 폭력, 사기, 압제, 경제 양극화와 정부의 수탈이 횡행하여 혼란하여 마음을 둘 곳 없는 로마인들이, 도대체 저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평안하게 죽느냐고 너도 나도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인과 예수라는 대답을 들었고, “나도 예수를 믿고 싶소! 나도 그 예수를 전해주오!” 라고 수소문하며, 카타콤으로 수 많은 로마인들이 인도되는 장면을 성령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