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즈음에 익명의 교육기관에 제출한 글입니다.
분량이 600쪽이 넘는 책을 최대 6쪽 안에 집어 넣어야 하므로, 이 책을 읽은 데에서 몇 부분만 추려서 쓰려고 합니다. 어느 한쪽에 몰려 있지 않고, 살면서 하나님을 만난 신비 체험에 따라서 골고루 쓰고자 합니다. 남이 써놓은 글이 아닌, 독창적인 글을 써야 한다는 조건 때문입니다. 동시에 제가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을 만나 보고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시키신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처음에 불순종을 해서, 수 만명의 사람들을 죽도록 내버려뒀습니다. 이게 어떻게 수 만명이냐면,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아이슬란드 화산 대폭발 같은 대형 참사들, 유영철, 죽음의 사진기사 같은 연쇄살인마 사건들 이전에 예수님께서 제 뇌리 속에 나타나셔서, 경고하라고 시키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은사에 부정적인 시대라서, 하나님과 은사사역에 대한 반항심으로 입을 꽉 다물고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현실로 이뤄져서 아무 준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꽤 됐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 뇌리 속, 어두컴컴한 배경에 하얀 빛으로 찍힌 교훈의 글자들은, “기독교계가 성령님과 은사를 무시, 거부하면, 그 나라에 죽음의 심판과 저주들이 반드시 쏟아진다”입니다. 1996~2011년 사이로서, 한국의 명문 신학교에서 은사중단론을 주창하고 유행하던 시기 막바지에 일어난 연속 참사들입니다.
에베소서 4장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삼위일체설
P.302에서 “인간의 육체적 본성으로부터 하나님을 상상할 수 없도록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린 시절에 경북 예천 외가댁에서 본 환상이 있습니다. 마귀 사탄이 사람에게 끊임없이 성경 구절에 대해서 의심을 하거나, 뒤집어 생각해보거나, 말씀을 연결하고 전체적으로 조감하게 하는 능력을 잠깐씩 스쳐서 보여주니, 사람들은 적힌 말씀에 모순 또는 한계, 전혀 새로운 관점과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됐고, 초대교회의 교사들에게 그 관점을 물어보게 됐습니다. 이에 대해서 교사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벙쪄있는 얼굴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을 하고자, 신학이 탄생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나는 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들아! 사람의 말의 한계에 따라서, 이런 혼란이 발생한다. 사람들의 기존 경험상에 사용하던 용어의 의미와 내가 말하려는 중심 사상이 잠깐 교차점이 맞아서 성경에서 쓰여지는 것이지, 성경에 적힌 단어가 내가 말하려는 모든 뜻을 항상 포괄하는 게 아니란다. 접점을 가질 수 없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차원의 세계에서, 나의 의지로 너희에게 나아간 결과 접점을 가지게 된 거란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 모르니 헷갈린다.”
그 예로 P.304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하나님께서 낳으셨나? 만드셨나? 로 그 아들인지, 혹은 피조물인지가 중심 과제로 나와있습니다. 마침내는 니케아 교부들은, “성부가 성자를 낳으심은 완료가 아닌 지금까지 진행형”으로 가르치는, 자기들의 관념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삼위 위격에 관해서는, 완벽한 분할이 아니라, 구별을 하는 것으로서, 칼빈이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하나의 영적 본질에서 3개의 실체로 나타난 위격으로서, 삼위 일체를 설명했고, 니케아 교부의 계속 낳는 일은 어리석음으로 못 박았습니다.
제게 보여주신 삼위 구분의 시초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자신과 교류할 사람이라는 지성체를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면, 생명유지에 도움이 되는 신호에 쾌감을 넣어주고, 생명유지에 해가 되는 자극에는 고통을 감지하게 해야, 하나의 생명체가 지속적으로 살아가고 대를 이어서 발전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때, 당장 내가 편하고 싶으면 게을러집니다. 내가 게으름으로써 나를 부양하는 다른 가족이 더 고통스럽게 일을 해야 하지요. 성관계를 해야 자식을 낳습니다. 성관계를 지속적으로 장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성적쾌감을 부어주셔야 우리 생명체들이 성관계를 즐겁게 합니다. 하지만 그 쾌감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당장 우리 자신의 눈 앞의 즐거움 때문에, 성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즉, 창조와 생명체 유지에는, 피조물의 이기심과 무지에 따라 죄가 태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도 다 아셨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이 어떤 교환수단과 노력으로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다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큰소리 치며, 천사장 루시펠의 배신이 매번 반복되는 혼란 발생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스스로가 희생양이 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서 공생애를 하시다가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한분이 예수님 노릇하려고 하늘의 보좌를 비워두니, 우주의 천체가 균형을 잃고 제 마음대로 흔들려서 우주에 거대한 대참사가 일어나는 멋진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군가는 하늘 보좌를 지켜야 하셨습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들 곁에 다가 오셔서 항상 보살펴주셔야, 우리 사람들이 죄악의 위기마다 피하고 선하게 살 수 있는데, 성령 역할 하자고, 하나님께서 보좌를 비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자신을 셋으로 나타냈고, 각 역할을 분담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본 받아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심입니다. 그러나 칼뱅은 “본질이 성부에게만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도 보여주셨는데, 기존 유대교 영향을 많이 받은 고대 기독교 식의 생각에 따르면, 예수님을 빈 껍데기로, 성령님을 유령처럼 전락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기적 때문에, 굴복하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여전히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생각과 우월감, 그리고 과거 자신들의 조상들이 율법을 어겨서 오랫동안 나라를 잃고 고통받았던 경험을 생각하면, 도저히 삼위일체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이스라엘과 가까워서 유대교의 영향이 큰 동로마 지역 일대는, 끊임없이 유일신론이 압도적으로 영향을 끼치며 번번히 삼위일체론을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6세기에 무하마드의 이슬람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슬람은 단성론 기독교에서 파생된 이단으로서, 단성론 기독교 지역을 전부 이슬람 지역으로 바꿔놓았으며, 현재는 유대인들과 대치상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단성론 기독교를 심판하시고 거의 씨를 말리셨습니다. 최근에는 중동의 기독교 국가 레바논과 에티오피아가 이슬람화 됐습니다. 아직 러시아 정교가 남아있지요. 앞으로 정리될 겁니다. 그 뒤에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이제 너희가 다시 중동으로 가서 성경 말씀대로 올바른 기독교를 전도해라. 내가 사탄을 잠시 허락하여, 다 정리해놓았다! 나 하나님이 원하는 가르침을 펼치지 않고, 너희 사람들이 마음대로 생각하고 곁길로 가면, 결국 내가 이렇게 쓸어버린다고 전해주거라!”
이신칭의
요즘 이신칭의 하나 갖고, 많은 반론과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사실 이신칭의는 장 칼뱅과 마르틴 루터가 만든 말도 아니고, 개신교가 갑자기 만든 패러다임이 아닌, 원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누누이 반복 강조했던 말씀입니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P. 466에서, “칼빈은 구원론을 전개할 때에, 가장 중요한 [칭의론]을 먼저 취급하지 않고, 회개와 중생 이후에 칭의론을 다룬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P. 459에서, “회개는 히브리 말로 전환 또는 돌아옴이라는 말이며, 헬라어는 마음이나 의도를 바꾼다는 뜻이다. ~ 회개는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쪽으로의 참된 전향이며, ~ 우리 옛 사람과 육신의 죽임과 성령의 살림으로 구성된다” 라고 써놓았습니다.
이상의 내용에 따라서, 회개를 한 뒤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내용으로 적혀있습니다. 하지만 칼뱅이 대충 보고 지나간 부분이 있습니다.
P. 456에서, “복음의 전체로서 {회개와 죄사함}은 그 자체로서 내용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라고 쓰여진 부분이 있습니다.
P. 457에서, “죄사함, 중생과 회개, 성화와 선행의 본질은 거룩함에 있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상의 칼뱅의 주장들이 왜 칼뱅이 지옥에 갔는지, 성경 말씀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실상은 이론과 달리, 우리가 사람들에게 죄를 짓고서도, 하나님 앞에서만 회개를 하고, 단순히 우리가 거룩해지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준 데 대하여 벌을 받는 징벌적 혹은 배상적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임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를 가른 비유에서 중요 말씀만 올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순전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선행을 하면 천국, 악행을 저지르면 지옥으로 갑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행위를 무척 강조 하셨습니다. 반면 사도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배척했지요. 사람들은 [행위]라는 단어에만 신경을 쓰고 헷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쁜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사도 바울은, ‘안식일에는 불도 피우지 말고, 밥 먹기 전에는 손을 씻고, 옷 술에는 경전 말씀이 담긴 상자를 달라. 초막절, 유월절, 무교절을 지켜라! 무교절에는 누룩 넣은 빵을 먹지 말라! 유월절에는 쓴 나물과 어린양을 먹어라! 소와 양, 비둘기, 염소의 각을 뜨고, 고운 가루와 기름으로 제사를 드려라!’ 등등의 각종 유대교 율법에 명시된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칼뱅 이후 부터, 지금까지 선악 행위와 유대교 율법 행위를 헷갈리므로, 수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잘못 가르치고 지옥에 떨어지고 있으며, 저는 직접 봤습니다. 아니 의도적으로 뭐든지 율법주의라고 매도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모를 제껴놓고 집사와 놀아난 것을 지적해도 율법주의, 공금횡령하다 걸려서 지적해도, 목사님들이 율법주의라고 되받아 치는 장면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모와 집사의 남편은 스트레스 받아서 화병으로 죽고 남편 목사와 아내 집사를 용서하지 못해서 지옥에 갔습니다. 남편 목사와 아내 집사가 바람피는 것을 하나님께서 걸리게 하신 뒤에 교회에서 내쫓아버리시는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야고보 서의 말씀을 인용하면, 도리어 행위론적 구원관이라고 비판을 하며, 이단심사로 넘겨버리는 장면도 보여주셨습니다.
야고보서 4: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성경말씀에 따라, 신학 이론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죄가 죽었으며, 우리는 의로움을 입었다고 요약이 됩니다. 저는 덕정 사랑의 교회 최보라 목사님이 칼뱅이 지옥에 있다고 간증하기 전부터, 1983~84년도 각각 그가 지옥의 깊은 골짜기 아래, 목만 내놓고 땅에 묻혀서 고통받고 있는 장면을 본 사람입니다. 땅 속에는 뱀과 구더기가 그의 살을 파고 들어갔습니다. 또는 그가 사방의 말뚝에 묶여 있기도 했습니다. 이론을 잘못 풀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목사님들이 죽어서 하나님 앞 심판대에서 충격을 받습니다. “너 지옥 가라!” 라는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때부터 목사님들이 신학교리를 설명합니다. “하나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 죄가 사해졌잖습니까? 로마서에 아무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고 구원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회개했어요. 죽기 전에 말했잖아요!”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이유는, 지금 너처럼 내 앞에서 떳떳이 당연히, 마치 나한테 맡겨놓은 물건 찾듯이, 천국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때문에 너희가 아무리 선행을 하든 말든, 교만한 네가 내 나라에 들어오는 조건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성경에도 나 여호와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를 들인다고 쓰여있지 않느냐?
단지 너희가 불쌍해서, 사람이 스스로 천국에 들어올 수 없으므로, 내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단다. 그런데 나의 긍휼과 내 아들의 십자가 희생이, 마치 나 여호와가 너희 사람에게 빚을 진 것처럼 교리를 만들어놨구나? 나 여호와가 너 사람에게 큰 빚을 진거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깊은 한숨을 쉬시고 옆에 서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안색이 바뀌시고, 성경에 적힌 일들이 그대로 벌어졌습니다.
마태복음 7장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10장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