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의 전적 구원이 틀림
여기까지 서술을 요약하면, 구원에 관해서 장 칼뱅의 교리가 틀렸습니다. 장 칼뱅의 말에 넋 놓고 있으면, 축복도 구원도 받지 못합니다. 정말 저는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모두 지옥에 있는 장면을 어린 시절부터 봤습니다.
하나님의 견인은 성도가 마음을 열어서 따라가고 받아들여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할 수 없으셔서 성도에게 축복과 구원을 억지로 못 집어넣으시는 게 아닙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성도를 천국으로 데려가봐야, 루시퍼의 반역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억지로 안 하시는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은 자동 기계 시스템이 아닙니다. 단순히 교회가서 등록하고 예수 믿는다고 백날 떠든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그 분의 인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하기 싫은 지시라 할 지라도,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로 따라나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주도권 다툼
2010년도 9월까지는 저는 일 안 하고 음악책을 읽으며 음악 공부를 했기 때문에, 별로 아쉬운 게 없었습니다. 9월부터는 종각역에서 주말 편의점 야간 일을 했지만 그 것도 일상 속에서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별로 아쉬운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2011년부터 제가 컴퓨터 프로그램, 하드웨어 등등을 마련하다보니, 순식간에 카드빚이 급증했습니다. 빚독촉을 해결하고, 공부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타협점에 맞는 일을 찾고, 일과 음악 공부를 양립하느라 무척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뜻이 맞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과거에 주셨던 여자를 다시 찾아가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억지로 받아주마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안된다! 지나갔다!" 였습니다. 대신에 다른 요구, 다른 자매를 제게 제시했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환경 속에서 예수님 또는 성령님께서 나타나셔서 귀띔을 해주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무엇을 하든 말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하나님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께 네가 순종하고 의지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답을 다 알려주셨음에도, 저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제게 주시거나, 시키시면 저는 거부했습니다.
“싫어요! 안해요! 안 갖아요! 냉큼 다 치워버리세요! 줘도 안 갖아요!”
나중에 삶이 너무 힘들어서 도로 기어갑니다.
“하나님, 제가 할 게요. 제가 그 자매 받아줄게요. 다시 그 일자리 돌아갈게요! 그러니까 삶 좀 풀어주세요. 제가 다시 돌아가서 그대로 행하면 삶이 풀리는 거죠? 예?”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앞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하지 마라! 안 해도 되고, 안 갖아도 된다! 너 말고도 할 사람 많고, 너 말고도 그 딸 사귈 사람 있다! 됐으니까 하지마라!”
행위 구원론이 틀림
행위 공로자들은 말합니다. “기도가 쉬운 줄 알아? 장시간 집중해서 부르짖어 하나님 찾는 게 쉬운 줄 아냔 말야? 금식이 만만해? 선행이 공짜냐구? 그러니까 기도, 금식, 선행 이 모두 공로가 있는거야!”
그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증을 섰는지 큰 빚을 져서, 부자에게 가서 빚 탕감 좀 해달라고 사정사정 합니다. 부자는 마음을 쉽게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몇날, 몇 달이 되든 그를 쫓아가서 애원하고 빌며 부탁합니다. 궂은 일도 마다않고 해주며 사정합니다. 부자가 마지못해 감동해서 빚탕감을 해줍니다. 그런데 빚 탕감 받은 남자가 말합니다.
“부자는 나한테 빚 탕감을 당연히 해줘야 해! 이 건 내 공로야! 내가 그 앞에서 무릎꿇고 애원하고, 울며불며 그의 시중 들며 부탁을 했기 때문이야! 당연히 내가 외교적 수완을 잘 발휘한 공로지!”
이 말을 부자가 들으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겠습니까? 당장 그 자리에서 빚탕감은 모두 취소하고, 빚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며, 다시는 그 교만한 사람은 부자 앞에 오지 못 하도록 내쫓고 가로막았습니다.
알미니우스의 행위구원론과 카톨릭의 신인협동설 그리고 변승우 목사의 행위구원론이 그런 겁니다. 사랑하는 교회에서 금식, 기도, 봉사활동 많이 한다고 자랑합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거라고 공공연히 떠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애원하는 남자와 부자의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금식과 기도, 선행이 부자에게 아무 소용없는 남자의 애원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심정을 제게 여러차례 체험시켜주셨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예쁘고 돈 많은 여자를 제게 안겨주시고, 제가 음악을 시작하기 전에 제 음악 장르를 띄우기 위해서 그 전에 트로트와 성악 계통과 R&B만을 유행시켰습니다. 마침내 제가 일렉트로니카 반주의 아이돌 음악을 만들면 바로 뜨게 해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께 드린 대답은 “싫어요! 안할래요. 됐습니다. 안 가져요!”
제가 반대로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기계적으로 한다고 했을 때도, 하나님의 대답은 “됐다. 하지마라!”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 저 사이에서 종주권 다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글로 정리 하므로써, 하나님께서 제게 하나님의 주권에 관해서 가르쳐주신 삶을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기본 자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창세기15:6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분이 하실 일들을 믿으므로, 의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 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롬14:22~23이며, 신약 시대에서 고전13:1~3으로 나타납니다. 즉 믿음 없이 행위 하면 죄악이고, 사랑없이 수고와 봉사를 하면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주교 및 알미니우스와 변승우 목사의 행위 실천이 믿음과 사랑이라는 알맹이가 없으면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일이고, 더 나아가 죄악을 짓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바리새인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 열심히 하고 마음이 없으니까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사야29:13
사랑하는 교회, 변승우 목사의 종교개혁방법이 틀린 이유
하나님께서 변승우 목사에 대해서 변론하시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칼뱅을 신봉하는 명문 장로교 대학교를 졸업한 개척 교회 목사들이 변승우 목사를 교리로 반박하고 자꾸 시비를 거니까, 변승우 목사님이 화가 나서 어쩔 수 없이 대처한 것이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변승우 목사의 죄악도 지적하셨습니다. 마음 속에 명예욕과 권력욕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신천지의 이만희, 통일교의 문선명 등과 특별히 다를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락방의 류광수 목사는 완전히 판박이입니다. 종교개혁하다가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도 지옥에 갔는데, 그 이유는 카톨릭 사람들을 교화하기 보다 신랄하게 비판하고 인격 모독하기에 바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변승우 목사도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따라하면서, 한국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욕하면 지옥 갑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교회에 종교개혁 사명을 부으시는 장면을 어린 시절에 저도 봤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인용한 성경 구절들이 변승우 목사님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판결의 근거가 됩니다.
변승우 목사님은 앞서 말씀과 약2:11에 따라서, 한국 교회들을 비방만 해대고 어지럽히니까 지옥에 가는 겁니다. 변승우 목사님이 말한 행위구원론이 본인의 비행을 구실삼아서, 변승우 목사님을 지옥행으로 고소합니다! 남의 죄악에 대해서 최소한 사실대로 설명하되, 지나친 욕설과 비하, 조롱부터 삼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속 마음은 본인도 판단키 어렵기 때문에 겉모습을 자제하라고 1차적으로 쉬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침례 요한이 독사 새끼라고 욕을 했다고 우리가 다 따라하는 건 위험합니다. 그럼 예수님과 제자들이 포도주를 식사 때마다 드셨으니까, 우리 개신교 성도들도 끼니마다 술 마실까요? 술 자주 마시는 자들은 지옥 간다고 입신 체험 많이 나오잖습니까?
더 진실하게 말한다면 한국 교회를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중보기도하고,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넘어진 자를 일으키고 뒤처진 자의 손을 잡아 끌어주며, 저는 자를 부축하세요.
그런 마음으로 종교개혁을 해야지, 무작정 남을 꺾어서 올라서려는 마음으로 일을 저지르니까, 제가 4~6살 사이 나이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러한 일을 맡기시지 않습니까? 제가 하고 싶던 싫던 상관없이 의무에 따라 이런 글을 씁니다. 그러지 않아서 제 20~30대 삶을 진창에서 허우적 거렸습니다.
40대에 들어서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순종만 하니까 각종 위험을 미꾸라지처럼 다 피하고, 다른 사람들이 절 공격하더라도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죽음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이 시리즈의 글 모음 위치 : https://blog.naver.com/jative/221762430304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