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神學) 교리(敎理)
예정설을 반박하는 말씀
이 논문 3쪽 마지막 줄에서 “교리는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역사에 의존해야 한다” 는 칼뱅의 주장을 증거 하겠습니다. 여기서 장 칼뱅의 예정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집니다. 이 논문의 다른 부분에서는 제가 크게 비판하지 않겠는데, 예정론의 선택과 유기는 인간이 함부로 단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현실적 시각에서 성경을 해석할 때, 논문 5쪽 “예정은 쌍방 예정으로 선택과 유기로 되어 있다”가 맞는 말 같습니다. 특별히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선택과 나머지 사람들은 유기되는 것이 사실이잖습니까? 물론 신약에도 예정에 관한 말씀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가룟 유다는 선택적 유기로 악한 역할을 맡다가 지옥으로 버려졌는데, 냉정하게 말해서 예수님 시대에도 선택과 유기가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미 믿는 사람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선민(選民)사상이 개신교에서 재현되는 것일 뿐이며, 그 때문에 벌어진 행악과 심판이 살전2:15~16에 써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신약에서까지 예정 선택과 유기를 고집 하면, 사람 사이에서는 아무리 인정을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한테는 버림받아서 지옥으로 내팽개쳐집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길 원하시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대속물로 자신을 바치셨다고, 분명히 의사표현을 했습니다.
디모데 전서 2장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디도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간접적으로 표현했지만, 선택과 유기가 빈번히 일어났던 구약에서조차 하나님께서 예정설에 따른 유기에 대해서 확고히 포기하는 발언을 직접 하셨습니다.
에스겔 18: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도, “야! 이미 구원받을 자와 버려질 자가 정해져 있는데, 이 건 그냥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듯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립 서비스 해준 거야. 그리고 나서 슬며시 자기 책임 회피하는 거지!” 라고 대답하실 건가요?
실제로 메리 캐더린 벡스터, 빌 와이즈 목사같은 전세계에 입신으로 지옥에 갔다 온 사람들이, 지옥에는 성도와 목사들이 아주 많이 깔려 있다고 말을 합니다. 하워드 피트만 목사의 간증대로 2% 이하만 선택받고 98%가 버림받을 예정된 운명인가 봅니다. 논문 5쪽에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사상은 우리 구원의 근거가 우리 자신의 신앙이나 행위에 있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 자신 속에만 있다” 는 내용에 따라서, 이미 결정됐으면, 뭐 하러 전도하고,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까?
예정론자들은 영혼들을 구원과 담 쌓게 해주는 데에 합리화를 시켜주므로 큰 문제입니다. 실제로 사람들 앞에서 예정설의 선택과 유기를 즐겨 가르쳤다간, 버림받을 자들을 양산시킵니다. 논문 5쪽에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을 내버려 두셨다” 라고 썼으므로, 조금만 상황이 어려워지고 핍박과 순교가 나타나면 전도와 선교에 소홀해집니다.
이런 식으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 대해서, 예정론자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 죄 값을 다 뒤집어쓰는 장면을 서울시 관악구 난곡동에서 1983년에 보여주셨습니다. “예정론의 선택과 유기에 따라서, 저 사람들은 버려졌다!” 라고 단정을 지어선 안 되고, 골4:2~3처럼 전도할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라도 줄기차게 해야합니다.
논문 5쪽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과 섭리가 예정보다 우위” 라고 썼으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유기를 선택으로도 얼마든지 바꾸실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창19:29
지옥행으로 예정된 교리들
목사와 사모, 성도들이 자기 죄로 심판대 앞에 서서 지옥판결을 받으면, 다 한마디 씩 합니다.
“하나님, 제게 예쁜 아내를 주셨다면 저는 바람 피지 않았을 거예요!”
“하나님, 목사 남편이 바람을 펴서 화가 났어요. 분노를 풀지 않는다고 지옥이라니요!”
결론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삶을 인도하셨다고 지옥에 떨어졌다고 핑계 댑니다. 여기서 장 칼뱅의 예정론이 참으로 많이 인용됩니다. 이생에서도 예정론 갖고 하나님 앞에 대놓고 개기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예정론 속 선택과 유기를 함부로 말하는 것은 다음처럼 난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낸 거 아니요? 그 사람들 왜 버리셨어요? 우리가 당신 장난감 입니까? 솔직히 성경 뒤져 보세요! 왜, 에서, 파라오, 바벨론 왕을 버렸냐구요? 사실은 사실이고, 논리는 맞잖아요? 나도 그 피해자입니다! 당신은 제게 할 말 없어요!”
재판대 앞에서 그들이 아무리 논리 잘 내세워봐야 천사들이 끌어내서 지옥으로 내던집니다. 저는 교리(敎理)가 심판대 앞에서 종이호랑이처럼 힘 없는 헛소리 임을 워낙 많이 봐와서, 교리에 의지하지 말라고 서슴없이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고후10:5
이 건 단순히 논리(論理)와 교리(敎理)로서 신학자(神學者)들끼리 논증(論證)하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주 정확히 말하자면 영원한 영적 세계에서 힘의 논리에 따라서, 비빌 언덕을 보고 비비라는 것입니다. 이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펠라기우스와 알미니안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종교개혁가나 교부 철학자 같은 허술한 기초를 의지하면, 이사야36:6과 열왕기하 18:21처럼 됩니다. 창3:2~3처럼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한 번씩 거칠 때마다 희석되고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교리를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정설과 알미니안 둘 다 뒷받침할 만한 성경의 말씀들이 깔려 있어서, 둘 다 맞게 하거나 둘 다 틀리도록 논리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말씀들을 선택적으로 취합하면 되므로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23:23과 눅11:42에 따라서 어느 말씀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두 이론 하나만 선택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우리들끼리 김칫국 들이키는 일은 없어야 겠습니다. 빌2:12처럼 확정되지 않은 구원을 이루도록 노력행위를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사도 바울이 경고하고 자신은 피해 간 고전9:27의 말씀이 지옥으로 추락한 신앙 선배인 목사와 사제, 교황, 성도들처럼 여러분에게 이뤄집니다.
서울시 관악구 난곡동에서 1983년도에 받은 환상을 쓰겠습니다. 이 땅에 살 때는 “이미, 아직” 등등의 말장난하면서, 구원 예정론 일변도를 비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과 똑같이 지옥에 떨어지고 나면, 그저 버림받았을 뿐 입니다. 거기서 실컷 고통당하면서 예정론 곱씹어봐야, 자신은 지옥에 이미 내동댕이쳐졌고 온 몸이 아파 죽겠는데 죽을 수 없다는 절망 뿐입니다.
“난 버려지도록 예정돼있던 거야! 세상 사람들아! 예수 믿지 마! 어차피 기독교의 98%는 버려질 예정이야! 너희는 목사에게 돈과 노동력만 제공하는 들러리라구!”
이렇게 외치면서 예수님께 화풀이하고 싶겠지요. 그렇다고 이 땅의 우리들이 예수님을 안 믿어서 100% 버려지는 불신자의 무리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영원한 고통 앞에서는 교리와 논리가 다 말장난이고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나지 않음을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영원히 남는 것은 말씀이지 교리(敎理)가 아님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지탱하시는 말씀과 책임지실 필요 없는 교리(敎理)는 다른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정론자는 지옥에 버려질 98%가 50%, 20%, 10%, 0%로 낮아질 수 있다는 걸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정론이니까 98% 의 높은 비율의 버려지는 숫자가 나온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로교 세상에서는, 믿으면 믿는 대로 자만하고, 안 믿으면 안 믿는 대로 자포자기 하는 사람들을 성령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롬11:25를 보면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이스라엘이 우둔해져서 유기를 당한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예정론을 정설로 여기며 선택과 구원받았다고 롬11:18~19처럼 자랑하다간, 롬11:21~22처럼 내팽개쳐집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 버려진 이유를 롬11:20에 유대인의 믿음 없는 행위에서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칼뱅주의자의 눈에는 사도 바울 조차도 행위구원론자입니다.
논문 6쪽에 “선행은총을 통해서 선한 자유의지가 생겨난다 ... 은총의 도움을 통해서만이 선행을 할 수 있다 ...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통해서만이 .... 선택의 자유를 굳게 된다” 라고 써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수천년 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은총을 받았습니다. 바로 위 인용한 성경구절대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버림받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선행은총으로 생겨난 선한 자유의지 교리는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뒤집어 엎었습니다. 광야 시대에 40일 정탐에서 거부하므로써 이스라엘인들이 엎어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따르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구약 선지서에서 끊임없이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의지와 노력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 은총으로 자동적으로 선한 의지가 생기고, 선한 삶만 산다면, 장 칼뱅부터 수 많은 살인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개신교 목사들이 쏟아내는 기상천외한 범죄들은 자동적으로, 로봇처럼 사람이 선하게 바뀌는 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신학을 깨부수기 위해서 나 하나님이 허용한 것이다!" 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을 점진적으로 이스라엘 지파들이 정복해가듯이, 성령님께서 우리 사람의 심령을 점진적으로 정복해갑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람이 받아들이고, 바뀌려는 노력과 의지에 따라서 그 시간이 짧거나 길어집니다. 심지어 죽을 때까지 못하기도 해서 지옥에 쳐박힙니다. 히브리 3:10~19
사도 바울이 로마서 구절을 쓴 게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개신교에서 장 칼뱅이 예정론을 내세울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초대 교회 시대에 종교개혁기와 같은 상황을 시연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니골라 당과 에세네 파, 이세벨 파가 성행했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예정론을 경고하는 말씀을 쓰도록 하나님께서 조성하셨습니다.
이 장면을 성령님께서 1983년 서울시 관악구 난곡동에서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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