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음란, 세속에 지배당하는 기독교
2001년 군제대 이후에 신학교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한 이후에, 저는 아버지처럼 의처증 환자가 됐습니다.
홍익대학교 안에는 여학생들이 버젓이 담배를 피며 활보하고 있었고, 홍대 밖 거리에는 너무나 많은 여학생들이 술에 쪄들어서 누가 들쳐업고 가도 모를 정도로, 길바닥과 술집 마다 퍼져 누워 있었습니다. 게다가 남녀 할 것없이 서로 짝을 바꿔가며 문란하게 놀았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이런 고민을 2003년 봄 강서구 가양동 새생활 영성훈련원에 예언 상담을 받을 때마다 물어봤습니다. 예언 사역자들은 대부분 여자 전도사였는데, 자신의 과거 죄를 회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별 문제 아니라고 답했고 심지어 자기도 한 때 잘 나갔었다며 자랑을 했습니다.
“형제님,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사(死)해주셨어요! 그리고 조선시대도 아니고, 여자가 자기 삶에 결정권도 있지요!
요즘 그런 게 대수인가요? 젊어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지! 마냥 남편만 믿고 어떻게 살아요! 아내가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럼 남자 목사들은 똑바로 잘 사나요?”
여성도님의 발언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교훈을 낸답시고 이런 저런 말 길게 해봐야, 세상사조와 철학, 세속 윤리에 당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있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딤후4:3~4처럼 사람들은 제 발로 교회 나가면 그만입니다.
이런 경향은 시온 기도원도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제가 황당해서 하나님께 여쭸습니다.
“하나님! 보세요! 주님께서는 남자인 제게 혼전순결과 경건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여자 심지어 사역자조차도 저렇게 문란한데, 왜, 제게는 자유를 박탈하시고, 차별하십니까?”
“아들아! 나는 내 귀에 들린 대로 갚아준다! 너는 잘 선택해라! 죄를 갚는 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의 줄에 설 것인지, 아니면 심판을 피할 길에 설 것인지! 아들아! 너는 젊어서 앞날이 창창한데도 나 하나님을 보므로 조심할 줄 안다. 그러나 저 딸들은 다 늙어가서 미래가 없음에도 방종한다. 누가 더 불쌍하냐? 그 끝이 어떠하겠느냐? 줄을 잘 서거라!”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이상의 이유로 저는 남자임에도 마치 전통적인 여자마냥, 혼전순결과 경건한 삶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체념하듯 분노를 삭이며 온건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아시아 교회와 시온 기도원에 이혼이 유행했습니다. 겔 24:13 여 성도들의 남편들이 젊은 여자랑 눈이 맞거나, 사업 파트너 혹은 직원이랑 눈이 맞아서 이혼을 주르륵 해버렸습니다. 그 다음부터 영성훈련원들은 음란죄를 큰 죄로 여기기 시작했고, 여성도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의부증에 걸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공의가 사람들의 삶을 아주 깊이 통제, 조종하면, 사람들이 두말없이 성경에서 지시하시는 가치관으로 생각과 감정이 고쳐집니다. 성령님께서 잠13:24을 보여주시며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사람은 맞아야 정신 차린다!”
논문 4쪽에서 “하나님의 주권이라함은, 개인과 공동체에 해당되는 것을 넘어서 우주적 차원으로 넘쳐난다. ....... 전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니까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사람들의 죄악에 따라서 두들겨 패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들이 너무 값싼 사랑에 푹 빠진 나머지 하나님은 심판하실 수가 없고, 요한계시록의 때가 아닌데 심판을 말하는 게 이단이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목사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자기 편할 대로 상황에 따라서 이용해먹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마음대로 때리지도 못하시는데, 그게 무슨 주권 있는 통치자 입니까? 장 칼뱅의 신학 교리는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높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목사들의 탈선 이유는,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고 안 두들겨 맞아서 그렇습니다. 신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좋은 글 많이 쓰인 유교와 불교 시대였던 삼국시대, 고려, 조선 시대에는 태평성대 천국이었어야지, 왜? 민초들의 곡소리, 원성이 하늘에 사무치도록, 특권층들이 착취를 했습니까?
초자연적으로 감시하시는 하나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냥 좋으신 하나님만이 아니라, 엄히 다스리시고 공정히 판정하시는 무서운 하나님도 사람에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미3:11~12
목사와 신학자들이 당장 자기 죄악을 덮기 급급해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예언을 받아서 쏟아내는 지적들을 이단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교리로 따지면 논문 5쪽에 나오는 이신론(Deism)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법칙을 만드셨을 뿐, 스스로 돌아가는 세상과 담쌓고 지켜보시는 분”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구약 선지서와 열왕기에서 선지자들이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책망의 말을 쏟아냈다고 적혀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무리하게 건축하는 교회들이 도산하거나 이단에게 팔려나가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조용기 목사의 번영신학을 패대기치시면서 목사들에게 바벨탑 쌓지 말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널리 가르침을 펴시고 계십니다. 논문 5쪽에 다음처럼 쓰여 있습니다.
“사람은 악의 문제가 발생하지만, 칼뱅은 하나님의 허용작정을 말하면서 마지막 악의 문제는 악을 행한 자에게 책임을 돌리며 관여하신다라고 했다”
말 그대로 한국 사회를 배금주의(拜金主義)로 빠뜨려서, 서민들의 눈에서 눈물 나게 만들었던, 조용기 목사의 번영(繁榮)신학과 한국 교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철퇴를 내리셨습니다. 그 들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드셨습니다. 저는 이 내용을 공식적으로 2016년도에 편지로 써서 여러 교회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리고 네이버 포스트 [아우터레위]에서 [신서1권]을 검색하시면 읽으실 수 있습니다.
논문 내용정리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그분의 초자연적 심판을, 선지자 하박국처럼 우리 성도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 안에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이성, 초자연적 권능의 연타(連打) 앞에서 사람들은 변론조차 내지 못하고 책임 추궁도 못 합니다. 렘 6:24, 30:6처럼 두들겨 맞고 쓰러지기 바쁩니다. 그 때 살며시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비는데, 바로 이 것이야 말로 주(主)님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사람이 징계하고 사람이 잔소리하면, 대부분 되받아 칩니다. 마7:6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징계하시면, 사람들이 그 징계마저도 영광으로 알고 눈물 흘리며 감사합니다. 때리시는 그 하나님의 손과 매조차 만지고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매달립니다. 자기한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영광이랍니다.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방법은 부작용이 거의 없습니다. 히10:30 사람이 잔재주를 부리기보다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이로써 프린트 3쪽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글이 있습니다.
“최고의 심판자는 성경 안에서 ........ 교회 회의의 모든 명령과 고대 학자들의 의견과 인간과 개인의 정신 문제도 이 심판자의 감독을 받아야 하며, 거의 판결에 순응해야 한다.”
그 글을 증명하는, 공의(公義)로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 권능과 초자연적 기적으로 이루셨음을 서술했습니다.
동시에 다음 줄도 같이 증거했습니다.
“성경의 권위와 신적 기원에 대해 칼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교회로부터 오지 않는다”
앞에서 여(女) 예언자들이 교회 안에 세속논리와 페미니즘을 끌고 들어왔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단체로 심판을 내리심으로써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습니다. 개별적 교회의 세속에 물든 판단을 성령의 권능과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봉쇄 시켜 버렸습니다. 겔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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