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16~17세기 유럽의 종교동란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는 영주가 종교를 결정할 수 있었지만, 영내에 있는 농민을 포함한 백성들 각 개인은 종교 결정권을 가질 수 없는 불완전한 결정이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독일 국민들은 루터교와 카톨릭만을 선택할 수 있었을 뿐이었고, 프랑스는 카톨릭이 신교도를 여전히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장 칼뱅이 세운 장로교는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에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길을 여셨습니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에 대해서, 프랑스가 앙주 가문 이래로 자신의 지배권한 아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이탈리오 북부의 밀라노 공국을 신성로마제국은 자신의 봉토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교황 알렉산드르 6세(스페인 출신)의 적(敵)인 줄리아노 추기경의 꼬드김을 받아서 이탈리아를 침공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밀라노 공국이 프랑스에 가까워서 이탈리아 침입의 육지 통로 지역이었습니다. 그 이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때부터 싸웠습니다. 이후 프랑스 앙리 2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 프랑스는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를 신성로마제국에게 양도 하게 됐습니다. 이 결과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보다 종교적 자유가 보장된 신성로마제국으로 네덜란드가 넘어감으로써 네덜란드에 신교 세력이 더욱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본래 네덜란드를 포함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의 3개 나라는 부르고뉴 공국에 속한 땅이었는데, 앞 문단을 포함한 전쟁과 왕족들 간의 상속 문제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갔습니다. 카를 5세는 두 아들 페르디난트 1세와 펠리페 2가 있었는데, 두 아들에게 영지를 나눕니다.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를 가까이에 있는 신성로마제국을 물려받은 장남이 아닌, 머나먼 스페인을 물려받은 차남에게 물려줍니다. 카를 5세는 네덜란드 헨트 지방에서 태어나서 각별한 관심을 가져서 문제가 없었는데,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서 나고 자라서 완전히 스페인 사람인데다 스페인 귀족들을 파견해서 무자비하게 통치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오스만 투르크를 레판토 해전에서 격침시키므로써, 비잔틴 제국을 포함하여 넓게 영토를 확장했던 오스만 투르크에게 쇠퇴일로衰退一路를 시작시켰던 때라 아주 기세등등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을 보호하고 신교를 핍박한다는 정책을, 자신감에 힘 입어 더욱 가혹하게 네덜란드에게 내렸습니다. 처음에는 온건한 돈 후안 드 아우스트리아가 총독이 돼서 네덜란드의 불만을 잠재웠지만, 그는 질병에 걸려서 곧 죽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네덜란드를 독립하는 쪽으로만 이끄셨습니다.
이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다스리던 때였고, 드레이크 제독을 포함한 영국의 해적들이 스페인의 배들을 털어서 먹던 시기였습니다. 그 해적들은 영국 왕실의 윤허를 받은 사략선이 됐고, 스페인과 영국은 서로 미워하게 됐습니다. 게다가 같은 신교도인 엘리자베스 1세가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므로써 스페인과 영국은 바다에서 격돌합니다. 이 게 바로 칼레 해전으로써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전으로 역사에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신교 기술자들에게 전쟁 무기를 만드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대포의 경우 기존의 청동대포보다 값싼 생산비와 월등한 성능을 자랑하는 철포를 영국이 발명하도록 하나님께서 시키셨습니다. 조선과 화약 기술도 영국이 훨씬 앞섰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전쟁으로 서로를 격침하는 배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마침 불어온 태풍과 거친 파도로 스페인이 진 거라고 합니다. 사람이 한 게 별로 없고 다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役事) 였습니다.
스페인은 영국에서 해전으로 이긴 뒤에 주력 부대를 영국에 상륙시킬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적함대에 주력 육군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함대들이 침몰 하므로써 스페인은 이후 강대국에서 약소국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런데 이 해전이 한 번이 아니라 몇 번 더 있었습니다. 따라서 네덜란드 독립군은 골키퍼 없는 골문에 슛을 차 넣듯이 북부 7개 주에서 독립을 이뤘습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종교로 인한 30년 전쟁 후에는 네덜란드는 완전히 독립합니다.
프랑스의 개신교 자유
여호와 하나님께서 16세기에 노스트라다무스를 그분의 선지자이자 전령으로 들어쓰셨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자신의 예언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그의 예언책 머리글과 예언시 안에 써놨습니다. 앙리 2세의 왕비 까뜨린느 드 메디치에게 노스트라다무스가 남편인 앙리 2세와 3명의 왕자들의 죽음,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부르봉가의 앙리 4세가 프랑스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까뜨린느 프랑스 왕비와 프랑스의 기즈 가문이 구교 세력의 주축이었는데, 기즈 가문은 여러 권력 핵심 관료직들을 차지하며 왕권에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귀족들은 이탈리아 부르주아 가문인 메디치 가문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오직 시아버지 프랑수아 1세만이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며 보호해줬습니다. 시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까뜨린느 왕비는 구교 세력에서도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이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써, 결국 까뜨린느 왕비는 자기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종교적 적이었던 앙리 4세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본래 마르그리트는 왕위에 도전했던 앙리 드 기즈와 사랑에 빠졌었습니다. 구교 세력 두 가문이 서로 사랑으로 화합하는 게 정상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까뜨린느 프랑스 왕비가 종교적 적이었던 부르봉 가문에 시집을 보냈던 것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결혼식날 벌어진 사건이 바돌로메 대학살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까뜨린느 왕비의 아들 샤를 9세는 천역天疫을 얻어죽고, 마르그리트 여왕은 평생 고생했습니다. 훗날 앙리 4세와 마르그리뜨는 이혼합니다. 그리고 앙리 4세는 프랑스 여왕 가문의 마리아 드 메디치와 재혼을 합니다.
프랑스 여왕이 신교도 지배자였던 부르봉 가문의 앙리 4세에게 평화적으로 왕위를 양도 했습니다. 이로써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며 프랑스에서 고통받던 위그노 교도들은 극적으로 구해냈습니다. 하지만 앙리 4세가 프랑스 국왕이 되는 조건으로 카톨릭 교도로 개종하는 것을 까뜨린느 여왕이 요구했습니다. 이후 프랑스 왕들은 위그노를 공인한 친 개신교 카톨릭 왕가가 됩니다. 그 때문에 프랑스에서 로마 카톨릭 추기경들인 리슐리외와 마자랭 같은 명 재상들이 활동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에서 벌어지는 지속되는 종교 전쟁 속에서 신교도들을 지지하게 됩니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낭트 칙령은 폐지됩니다.
30년 전쟁과 웨스트팔리아 조약
현재의 체코가 있는 보헤미아 지역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를 반대하면서 시작이 됐습니다. 전임 황제 마티아스 황제 때까지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종교에 관해서 강경과 온건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2세가 마티아스의 온건파 신하 멜히오르 크레즐을 투옥시켰고, 보헤미아는 따로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선출하면서 30년 종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차 전쟁(1618~1625)에서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인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서 프리드리히를 폐위시키고 영토를 뺏었습니다.
2차 전쟁(1628~1629)에서는 덴마크의 개신교 왕 크리스티안 4세가 북독일을 돕고자 진격했으나, 스페인의 발렌슈타인 장군에게 패배하고, 신성로마제국의 제후 자리도 뺏깁니다.
3차 전쟁(1630~1635)에서,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가 바바리아를 점령, 빈으로 진격하여 독일에서 구교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뤼센트에서 전사합니다.
4차 전쟁(1635~1648)에서, 북독일에서는 스웨덴이, 스페인은 프랑스가 맡아서 전쟁을 하도록,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이 계획을 짜고 지원합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에서 포르투갈이 다시 독립했고,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3세가 패배하여 웨스트팔리아에서 조약을 체결합니다.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하고 개인이 온전히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하게 됐습니다. 이후부터 신성로마제국은 허수아비로 전락했으며, 프랑스는 절대왕정을 구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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